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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으로 세상에 나온 왕? 그러나 성군이었던 고려 제 8대 현종

윤여시 2023. 10. 3.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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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으로 세상에 나온 왕? 그러나 성군이었던 고려 제 8대 현종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항상 등장하는 대사, '사직의 존속을 보존'하고 '혈통'과 '왕위계승' 같은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얼마나 과거 왕실이 왕위를 이을 자식에 집착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왕위 계승에 있어 불륜을 통해 세상에 나온 아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려 제 8대 현종의 출생은 아주 묘하다. 고려 제 8대 현종 그는 과연 누구일까? 

|고려 제 8대 현종의 출생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현종

고려 5대왕 경종 이후로 고려 왕실은 왕위를 승계할 왕자 부족이 극심했다. 특히 경종이 죽을 당시 그의 아들은 겨우 두 살에 불과해서 자신의 사촌동생인 6대왕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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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si0211.tistory.com

 
그런데 성종 역시 딸 둘만 얻고 아들을 얻지 못해 다시 경종의 어렸던 아들 제7대왕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 목종마저 단 한명의 자식도 얻지 못하면서 고려 왕실은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이때 왕족 중에서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 사람은 왕욱뿐이었다. 왕욱의 아들 이름은 왕순으로 그는 왕위를 승계할 왕자가 없는 상황에서 시선이 집중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왕순의 족보는 복잡하니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를 알면 그가 왜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순의 탄생>

왕순의 아버지 왕욱은 고려 태조 왕건의 5번째 왕비였던 신성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왕순의 어머니이자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는 태조의 4번째 왕비였던 신정왕후 황보씨가 낳은 아들의 딸이다.

즉 다시 말해 왕순의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는 삼촌관계인 것이다. 헌정왕후는 고려 제 6대왕 성종과는 남매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이들이 정식적인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정왕후는 자신의 남편이었던 경종이 죽고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가는 왕륜사 남쪽에 있었는데 그 근처에 왕욱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왕래하였고 서로 연정을 품게 되었으며 곧 아이를 잉태한다. 이 일은 집안에서 비밀로 부쳐지다가 마침내 성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성종은 헌정왕후의 잉태 사실을 확인 한 후 992년 7월 왕욱을 귀양보낸다. 그리고 이때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산욕으로 세상을 떠난다. 여튼 바로 이때 세상에 나온 아이가 바로 왕순인 것이다. 

|고려 제 8대 현종, 어린시절 고난이 시작되다.

왕순이 비록 잘 못 태어나긴 했지만 엄연히 태조의 손자이자 성종 자신의 조카였다. 이에 성종은 왕순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유모를 선택하고 궁에서 길렀다. 유모는 항상 어린 왕순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를 가르쳤는데 어느날 성종이 찾아 왔을때 왕순이 성종을 아버지라 부르며 무릎 위로 기어올라왔고 이에 성종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 것을 명했다고 한다. 이때 왕순의 나이가 딱 2살이었다. 
 
이후 왕순은 귀양 가있던 왕욱에게 보내지는데 996년 왕욱이 병으로 죽자 이제 부모님을 모두 잃은 아이가 된다. 이때 왕순의 나이는 불과 다섯살이었다. 다섯살에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왕순은 성종이 죽고 7대왕 목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다. 바로 목종의 어머니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추태후(헌애왕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추태후는 어린 아들 대신 왕권을 장악하고 김치양이란 자와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는 목종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때문에 천추태후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순은 무조건적인 걸림돌이었다.
 
특히 왕순은 당시 이미 대량원군에 봉해져 있었는데 1003년 목종이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자 현종을 대량원군에 봉했기 때문이다. 이는 목종이 자식 없이 죽는다면 그가 바로 왕위를 이을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2009년 방영한 드라마 천추태후(극중에서 천추태후 역은 채시라, 김치양은 이석훈이 맡았다.)

때문에 천추태후는 왕순을 갑자기 머리를 깎게 하고 개성의 숭교사로 출가시켜버린 것에 이어 1006년 다시 양주로 내쫓은 후 이후 삼각산의 신혈사(지금의 북한산 진관사, 왕위에 오른 현종이 자신을 구해준 노승의 이름 진관이라는 이름을 절에 붙여 진관사가 되었으며, 그 일대의 동은 지금의 진관동이 되었다.)  란 절에 머무르게 한다. 여기에 끝없이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고자 했으나 신혈사의 노승이 방 안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는 방책으로 왕순을 숨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목종이 병으로 눕게 되면서 천추태후는 더 급하게 왕순을 죽이고자 자객은 물론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왕순은 죽음의 공포를 극심하게 느끼게 되고 목종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처지를 알렸다. 목종은 이때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고 자신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점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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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급히 왕순을 신혈사에서 데려오게 하였고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도성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왕의 명령이 천추태후의 계략이라고 생각한 강조는 이미 목종이 김치양 일파에게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는 자신의 병사 5천을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하는 '강조의 난'을 일으킨다.
 
이때 강조는 목종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멈칫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여 개경으로 쳐들어가  궁궐을 장악한 강조는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제 8대 왕 현종이며 그의 나이 이때 18살이었다. 

|고려 제 8대 현종,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작된 거란의 2차침략

KBS 드라마 강감찬 역의 최수종

왕위에 오른 현종은  현종은 성종대 이후로 과거에 등용된 인재들과 함게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기 시작한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 교방(음악을 가르치던 곳)을 없애고 궁녀 백여명을 해방시켰다. 또한 연등회를 부활하여 백성과의 화합을 도모하고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등 민심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며 백성친화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거란이 강조의 난과 목종의 폐위를 구실삼아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이에 현종은 강조에게 병력 30만을 주어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고, 마침내 거란왕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진군했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은 흥화진을 포위하고 도군검사 양규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유하며 목종을 죽인 강조를 보내면 회군하겠다고 말했으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거란의 제 2차 침략이다.
 
거란군 40만 대군 중 20만은 인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하고 나머지 20만이 퉁주로 밀려들었고 퉁주에 있던 강조가 병력을 이끌고 막아섰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거란군에게 죽고만다. 이때 거란군은 여세를 몰아 남하하기 시작했고 양국간의 전면전이 전개되었다. 고려는 거란의 대군을 맞아 반격했지만 한 달 만에 서경까지 내주며 후퇴했다. 

현종의 피난길

이듬해 1월에는 거란군은 개경까지 밀어닥쳐 궁과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고 현종은 경기도 광주에 머물렀다가 나주까지 몽진한다. 하지만 거란군 역시 고려군과의 전면전으로 이미 병사들이 지쳤고 양규와 김숙홍이 이끄는 천여명의 병력과 7차에 걸친 싸움 끝에 수만의 군사를 잃게 되면서 개경 입성 7일만에 퇴각하게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전쟁에서 양규와 김숙홍은 모두 전사한다. 

|거란의 제 3차 침략, 강감찬이 귀주에서 막아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거란군이 퇴각하자 현종은 2월 중순에 개경으로 돌아와 빠르게 정비하기 시작했다. 전란중 논공행상은 물론 백성들 중에 공훈을 세운 자들을 특별히 관직을 추징하는 등 전후수습책을 마련했다. 또한 전란중에 소실된 궁성을 복구하고 서경의 평양성, 송악성을 다시 중수했다. 
 
그런데 이제는 거란이 아닌 여진족이 전함 백여척을 이끌고 경주를 급습했다. 그러나 이미 전란에 익숙한 고려의 반격으로 여진은 곧 퇴각했고 1012년 5월에도 경상도를 침략한 동여진 군대 역시 막아냈다. 이렇게 당시 거란, 동여진 등의 지속적인 침략에도 고려는 현종의 치세하에 버텨내고 있었다. 
 
이때 현종은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자 거란과 화해를 모색하려 한다. 하지만 거란왕이 직접 현종이 자신이 있는 거란땅으로 오라고 하였고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다시 강동의 6개 성을 탈취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고려는 몇 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 거란왕을 달래며 현종이 와병중이라는 말로 양해를 구했으나 거란은 1013년 5월 여진과 함게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대장군 김승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고 돌아간다. 
 
이후에도 거란은 몇번에 걸쳐 강동의 여섯 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고려 침략을 했고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 10만군이 고려를 침략한다. 이것이 바로 고려 제 3차 침략이다. 그러나 이미 거란의 대군이 올 것임을 알았던 고려는 20만 병력을 조성하여 우리가 잘 아는 강감찬을 상원수,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거란군을 막아서게 한다.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의 일차 접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소배압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개경으로 진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나 강감찬은 당황하지 않고 거란의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전세의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다시 거란으로의 퇴각을 결정한다. 그러나 1019년 2월 귀주에서 퇴각하는 거란군은 기다리고 있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 완전히 몰살을 당하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귀주대첩이다. 

|현종, 두 차례의 전란을 이겨내고 치세를 펼치다.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포스터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현종이었지만 이미 수난을 극복하는데 전문가(?)였던 현종이기에 빠르게 황폐해진 국토를 돌보고 백성을 살피기 시작한다. 먼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거란군의 의해 훼손된 강동 6성과 각 지방의 성곽을 정비하여 국방에 만전을 기한다.
 
또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를 활성화화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인재를 우대하고 문인을 양성하여 국가의 재목들을 길렀다. 이때 거란에서도 전쟁에서 대패한 것으로 인해 1019년 5월 고려에 화친을 제의했으며 동여진에서도 화의를 약속하고 서 여진에서도 화의를 다짐했다. 이에 그해 9월 고려는 탐라, 흑수, 말갈 등 소수 민족들을 위해 연희를 베풀며 고려의 위용을 과시하고 변방의 안정을 꾀했다.
 
이처럼 고려는 현종대에 이르러 국난을 완전히 극복하고 국내외적으로 위상이 한층 높아졌으며, 고려 사회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간다. 현종은 또한 전란중에 소실된 문화재와 서적들을 복구하고 사초를 복원하기 위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한다. 또한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중수하고 6천 여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는데 이때 편찬된 실록이 고려 최초의 실록이자 이후 몽골의 침입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의 시초가 된다. 
 
이처럼 현종은 고려의 국난을 극복하고 위상을 대외에 과시하며 고려의 또 한번의 전성기를 이끌어냈으나 안타깝게도 1031년 5월, 그가 왕위에 오른지 22년 나이 40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거의 우리나라 왕 중에서도 TOP5 안에 들어갈만한 왕 현종에 대한 고려사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이제현 <고려사>

군자는 나라를 잘 다스릴 때에도 환난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 하며,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천도를 받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현종에게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구나

고려 현종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자랑스러운 성군이다. 그는 국난을 극복하고 고려의 위용을 세계에 알렸으며, 치세를 통해 백성은 물론 고려 문화의 융성함을 이끌어내었다. 그의 드라마틱한 출생, 숱한 고난의 성장기를 넘어 국난 극복은 어쩌면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은 삶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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