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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의 대가, 고려 역사 최고의 명장 양규 장군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3. 10. 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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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전의 대가, 고려 역사 최고의 명장 양규 장군 그는 누구인가?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등 한 나라를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자 이른바, 우리나라 역사에서 명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들은 누구나 꼭 한 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겠지만 단 몇천명의 군사로 수십만의 거란의 군대를 퇴각시킨 양규 장군에 대해서는 아마 잘 모를 것이라 생각된다. 소설속에서나 나올법한 전투를 끊임없이 해낸 장군 양규 오늘은 그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다. 

|거란의 2차 침입의 배경과 양규의 등장

고려거란전쟁의 양규 장군 역을 맡은 배우 지승현

양규 장군은 분명 불세출의 명장이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고려 제 7대왕 목종 때 형부낭중의 자리에 있었다는 기록만 살짝 남아 있을뿐이다. 양규 장군이 우리 역사속에 제대로 등장한 것은 바로 거란의 2차 침입이다. 

 

 993년 짐작조차가지 않는 80만 대군으로 제 1차 침입을 시도했던 거란은 외교가 서희의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났지만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거란의 명분이 된 것이 바로 강조의 난을 통해 목종이 폐위되고 제 8대 현종이 왕위에 오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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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에게 목종이 폐위된 사실을 알려준 것은 동여진이었는데, 당시 여진은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으며 서여진은 고려와 친하였으나 동여진은 고려와 사이가 안좋았다. 해서 동여진은 이 사실을 거란왕에게 말하였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거란은 옳다구나 하여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를 자신들에게 보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010년 11월 거란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것이 바로 거란의 2차 침입이다. 

빨간색 화살표가 거란의 2차침입

거란의 침입 소식을 들은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군사 30만을 보내 통주(현재 평안북도 선천)에 머물게 했다. 이때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흥화진(평안북도 의주)을 포위 하였는데 이때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장군이 바로 양규였다. 

 

비록 거란의 군대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 숫자였으나 양규가 지키고 있는 성이 견고해보이고 고려의 저항이 거세자 거란왕은 화살로 고려군측에 편지를 보낸다. '그대들의 전임금 왕송이 우리나라를 이미 섬긴지 오래되었는데, 강조가 오왕을 죽이고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내가 정예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으니 강조를 붙잡아 내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 처자들을 몰살할 것이다'

 

이 편지를 읽은 양규는 이를 무시했고 다시 한 번 거란왕이 이번에는 은접시 등을 통해 회유하자 양규는 “괴로움에 허덕이는 고려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자애로운 마음을 절실히 바랍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이며, 분골쇄신 길이 천년의 왕업을 받들 것입니다.”이라고 거란왕의 회유를 정중히 거절한다. 

 

이에 마침내 거란왕은 전면전을 선언하고 병력을 20만씩 나누어 한 쪽을 강조가 진을 치고 있는 통주로 출동시킨다. 

|강조의 패배와 양규의 출전

고려거란전쟁의 강조 역을 맡은 구마적 아니 배우 이원종

강조는 처음에 거란군을 맞아 병력을 셋으로 나누고 지형적인 이점과 검을 차에 달아 만든 검차부대로 연전연승을 한다. 그러나 방심했던 탓일까, 거란의 별동부대의 급습을 초반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가 거란군에게 포위 당하여 고려군은 삽시간에 포위 당하고 강조 역시 거란에 붙잡혀 죽고 만다.

 

이후 거란왕은 후방에 양규를 무시하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다시 한 번 강조의 명처럼 거짓 편지를 써 항복을 권유하나 양규는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고 온 것이 아니라며 거절한다.' 

 

이에 거란은 파죽지세로 곽주로 진군하였으며 곽주성을 함락하게 되는데 이때 양규가 별동대 7백명을 이끌고 흥화진을 출발하여 통주에 흩어졌던 군사 1천 명을 모아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적병 6천 명을 한번에 전멸시키고 백성 7천 여명을 구해 내는 말도 안되는 성과를 거둔다. 사실 이 곽주전투는 기적에 가까운 승리로 전적도 전적이지만 거란의 길어진 보급로를 움켜잡고 후방을 끊임 없이 교란하는 구심점을 마련했다는데 그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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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거란의 20만 병력은 이미 서경(평양)을 무너트리고 개경으로 내달리고 있었는데 중신들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했지만 강감찬의 결사반대로 나주까지 피신하며 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마침내 거란은 개경에 입성하여 개경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었지만 이미 현종이 피신한데다 양규의 후방부대로 인한 끊임없는 교란 작전에 거란왕은 부담을 느껴 후퇴를 결정한다. 

 

이들은 퇴각을 하면서도 불쌍한 고려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포로로 잡아 끌고 갔는데 이때, 양규의 활약으로 거란군의 기세가 꺾이자 후방의 고려군은 거란군을 무너트리기 시작한다. 귀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 여명을 참살하고, 양규는 적의 주둔지이자 20만명이 모여있던 무로대를 급습해 적군 2천여명을 죽이고 3천여명의 우리 백성을 구해낸다.  

 

그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 5백을 무찌르고 여리첨에서 1천 여명을 섬멸시키는 등 그야말로 무아지경으로 적들을 섬멸하니 원군도 없이 이 모든 것이 3개월만에 있는 일들이었다. 

|안타까운 영웅 양규의 전사

양규는 거란군을 소수의 병력을 통해 끈질기게 공격하여 거란군에게 타격을 입히는 전략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고려인들을 한명이라도 더 구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이렇게 양규가 구한 고려인이 무려 3만명이었으니 당시 고려 인구가 300만이라 가정해도 인구의 1%를 넘는 백성을 양규 혼자서 구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양규의 작전은 거란의 왕이 이끄는 본대를 만나게 되면 속절 없이 무너지는 유격전투였다. 그리고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에서 거란군 한 부대가 출몰 했다는 정보를 받고 출전하여 대승을 거두지만 이때 개경에서 올라온 거란군의 본대를 결국 만나게 된다. 거란왕이 이끄는 본대인만큼 정예병이었던데다가 지쳤다고는 하지만 병력이 규모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양규 부대는 포위를 당한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부대는 마치 맹수처럼 화살이 다 사라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지라도 끝까지 싸웠으며 양규와 김숙흥 장군을 비롯한 모든 부대가 전멸하고 만다. 이때 양규의 몸은 수십대의 적의 화살을 맞았다고 하니그가 얼마나 용맹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전투는 마지막까지 고려의 영토를 침략해온 거란군에 대한 심대한 타격은 물론 구출한 고려 백성이 대피할 때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쳐 싸운 결과였다. 

이후 거란군은 지칠대로 지쳐 퇴각을 하게 되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흥화진의 정성이 퇴각하는 고려군대를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히며 강동 6성을 다시 회복한다. 이렇게 거란의 2차 침입은 끝이나게 된다. 

 

|양규 장군의 전공과 후일담

양규는 생각해보면 우리 역사에 딱 3개월이 등장한다. 그는 원군도 없이 1개월 동안 7번을 싸웠고 거란의 보급로를 끊고 수많은 적을 참살했으며, 그가 구한 고려인 포로는 3만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해 거란의 군대는 개경을 점령했지만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어쩌면 2차침입에서 고려는 멸망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양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게 한 최고의 장수였으며 고려의 무수한 백성을 구해내 후일에 펼쳐지는 제3차 거란 침입을 막아내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석을 내리도록 하였다. 또한 그의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으며 김숙흥에게도 장군직 추증과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을 내렸다. 


이후 현종 10년에 공신록권이 발급되었으며 '삼한후벽상공신' 칭호를 내렸는데, 이는 태조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준 칭호이니 나라를 구한 양규 장군을 얼마나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규 장군, 그는 우리 민족을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위인중의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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