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귀주대첩의 패배! 끝없이 고려를 노렸던 거란 6대 황제 성종 야율융서

윤여시 2023. 10. 22.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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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의 패배! 끝없이 고려를 노렸던 거란 6대 황제 성종 야율융서

3차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던 왕 성종, 그 이름 야율융서.. 당시 송나라와 고려를 위협하는 동북아의 최강국이었던 거란 성종은 긴 재위기간만큼이나 내정, 영토확장 등 나름 거란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흔적을 남긴 왕이다. 그 인생에서 실패란 것을 찾아볼 수 없지만 고려에게만큼은 철저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던 성종 야율융서 그는 과연 누구일까?

|거란 6대 황제 야율융서

 

거란의 역사서 요사(요나라의 역사)에서는 성종을 이렇게 평가한다. "요나라 황제 중 가장 긴 재위와 명성이 높은 황제는 성종뿐이다" 그만큼 당시 거란의 왕 성종은 내정과 영토확장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왕이다. 

그의 이름은 야율문수노로 야율이 성이고 문수노가 이름이다. 한자로는 야율융서라 불렸으며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활쏘는 솜씨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야율융서는 불과 12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는데 이때 그의 어머니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한다.

 

성종이 장성하고나서도 승천황태후는 자신이 죽을때까지 오랫동안 거란 조정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27년간이나 되었다. 다시 말해 성종은 39세가 되어야 온전히 자신의 생각을 국정에 펼칠 수 있던 것이었다.

 

|거란 성종의 영토확장 그리고 고려와의 전쟁

 

거란의 성종은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서남북 거란의 영토를 확장한다. 특히 당시 중국의 북송을 침략하여 황하 이북까지 침략하였고 북송이 거란에게 공물을 매해 보내고 형제의 나라를 인정하는 전연의 맹을 맺기도 한다. 여기에 서쪽으로도 지속적으로 영토를 넓혀 중앙아시아까지 닿는 제국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종의 영토확장은 오직 고려에게만은 통하지 않았다.

고려의 1차 침략 당시 서희의 외교술에 영토까지 내주며 끝이났고 2차 침략은 성종 본인이 직접 군을 이끌어 개경까지 함락했음에도 자신들 심대한 타격을 입고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차침략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인해 궤멸하며 그 후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   

|거란 성종의 내정과 말년

 

거란이라함은 유목민의 나라라 질서가 없고 체계가 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종은 이를 극복해낸 왕으로도 평가 받는다. 법, 조세제도, 인재 등용 등에 있어 나름의 철학을 보여준 행보로 거란의 법치주의를 완성 시켰으며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이는 승천황태후가 섭정하던 982년~1009년에 이르는 27년 동안에 많이 펼쳐져서 후대에서는 이를 승천황태후의 덕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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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럴만도 한 것이 승천황태후가 죽고 거란 성종이 직접 통치했던 1009~1031년은 거란의 고려침략 실패와 국력소모로 인해 몽골, 남아 있는 발해 유민의 반란 등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특히 말년에는 사냥과 휴가에 빠져 살았다고 전해진다.

 

거란의 성종이 죽는 해였던 1031년에는 그해 5월에 고려의 현종이 죽었고 6월에는 거란 성종 자신이, 그리고 8월에는 강감찬이 죽으며 고려거란전쟁을 대표하는 세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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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성종의 역사적 평가

 

거란의 역사에서 성종은 분명 군사, 외교, 정치 등에서 발전을 이루어낸 명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우리의 역사속에서 거란의 성종은 침략 군주이므로 포악하고 신경질적인 왕으로 표현되곤 하지만 분명 그는 용맹하고 전략가적인 면모가 있는 인물이었던 것만은 틀림 없다. 

 

물론 그렇기에 우리 고려의 위대한 3번의 승리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며 당시 동북아의 명운을 걸었던 고려거란전쟁의 역사적 흔적이 크고 깊음을 알 수 있다. 

 

거란의 성종이 죽고 거란은 지속적으로 하향세를 겪다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징기즈칸의 몽골에 멸망하게 되니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성종 같은 왕이 후에도 계속 나왔다면 몽골의 징기즈칸과 거란의 유목민 대전도 흥미로웠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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