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고려

거란 침입 때 거짓 화친으로 현종을 구하고 죽음을 택한 하공진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3. 11. 12.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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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침입 때 거짓 화친으로 현종을 구하고 죽음을 택한 하공진 그는 누구인가?

거란의 2차침입 때 고려의 개경은 점령 당하고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몽진을 떠날 생각을 한다. 그러나 거란군의 속력이 너무 빨랐기에 현종의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이때 왕을 대신해 거란군 진영으로 가 시간을 끈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하공진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1. 하공진의 관직생활 

하공진 상상도

 

하공진이 태어난 때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진주 출생으로 성종 994년 압강도구당사(고려와 거란의 경계 압록강에 설치된 나루터를 지키고 관리하는 관직)에 임명되며 고려사에 첫 등장한다. 그는 목종때에 정 5품 무관직으로 있다가 1009년 목종 12년,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사랑을 나누고 있던 김치양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난을 일으키려 하자 목종은 당시 평양을 지키고 있던 강조에게 밀사를 보내 이를 막아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강조는 이미 목종이 김치양에게 죽고 거짓 편지를 보낸줄 알고 군사를 일으켜 도성을 치게 된다. 도성으로 진군하던 도중 강조는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대로 쳐들어가 김치양 일파를 척살하고 목종을 유배보내다가 살해했으며 현종을 왕위에 올리니 이것이 바로 강조의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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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하공진은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키는 역할이었는데 강조의난이 일어나자 하공진은 강조와 함께하여 상서좌사낭중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010년(현종 1) 하공진은 동북쪽 국경을 넘어 여진의 땅에 들어가 패배를 하였지만 분풀이로 여진족 95명을 참살하는 행동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귀양을 떠나게 된다. 

2. 거란의 2차침입과 하공진의 복귀

 

호시탐탐 고려 정복을 노리던 거란에게 고려의 강조의난은 아주 좋은 구실이었고, 이를 명분 삼아 거란은 2차침입을 감행한다. 처음에 고려의 강조 장군이 친히 거란을 막으러 떠나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거란의 야습에 휘말리며 고려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강조는 붙잡혔다 죽음을 맞이한다. 

거란은 이제 현종을 잡기 위해 북쪽의 강동 6주를 무시하고 빠르게 남하 작전을 펼치는데, 이때 강감찬이 끝까지 현종이 남쪽으로 내려가 거란을 막아야 한다며 피란을 주장한다.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를 지키는 병사들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현종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마다 그 지방의 호족들은 현종을 무시했고 심지어 공격까지 하며 그야말로 지옥의 피난을 경험해야 했다.

이때 유배에서 복직한 하공진이 현종의 피난 행렬이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처음에 현종은 하공진을 귀양 보냈기 때문애 분명 자신에 대한 감정이 안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 하였으나 하공진은 반역이 아닌 현종을 보호하고 고려를 지키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3. 거란 진영에서의 하공진의 거짓말 

 

한편, 이때 거란은 평양성과 개경까지 점령하며 기세가 워낙 막강했던지라 현종은 더욱더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하공진은 곧 거란군이 있는 본영으로 떠난다. 그런데 하공진은 떠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거란군을 맞닿뜨렸고 이는 자칫하다가는 현종이 위험해지는 것을 뜻했다. 그러자 하공진은 거란을 속이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

거란 장수가 '고려의 왕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하공진은그리고 저 먼 강남으로 이미 떠났다고 말한다. 거란은 고려의 지리를 잘 몰랐던지라 이미 고려왕이 멀리 떠난 것으로 알았고, 몇만리나 멀어져 버린 현종을 잡으려면 거란도 엄청난 고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당시 거란의 후방 보급은 고려의 양규 장군에 의해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고, 자칫 하면 모든 퇴각로가 다 끊길 판이었기에 거란의 왕은 고민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공진은 누구보다 이를 잘알았고 거란의 왕에게 '군대를 물리면 거란의 조정에 고려의 왕이 찾아가 항복을 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거란 성종은 퇴각을 결정하지만 하공진을 풀어주지 않고 인질의 개념으로 붙잡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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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거란 성종은 하공진을 극진히 대접하며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하공진은 거란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척 하며 신뢰를 얻고 탈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이내 발각되고 하공진은 당시 거란의 수도인 지금의 북경으로 보냈고 양가의 딸과 혼인까지 시키면서 하공진을 감시한다.

 

하공진은 이곳에서도 준마를 준비하여 고려로 도망갈 생각만을 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발각되어 하공진은 체포되고 성종은 어떻게든 하공진의 마음을 얻으려 했으나 자신은 고려의 사람이라며 거란의 충성을 거부한다. 여기에 하공진은 죽음을 이미 직감하고 거란 성종에게 거친말을 쏟아낸다.

이에 참을만큼 참은 거란의 성종은 1011년 12월, 하공진을 죽이고 그 심장과 간을 꺼내 씹어먹었다고 전해진다. 

진주 하공진 사적비

 

거란의 2차 침입, 수도 개경이 점령 당하고 남쪽으로 내려간 현종마저 온갖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하공진은 자신의 몸을 던져 거란을 속이고 철군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야말로 캐리도 이런 캐리가 없는 것이다.

고려에서는 하공진의 이러한 공을 잊지 않기 위해 '하공진 놀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이를 전수했으며, 현종은 그를 상서공부시랑으로 추증하기도 했다. 하공진은 지금의 진주 하씨 시랑공파의 시조이기도 하다. 

 

여튼 국가와 왕이 일촉측발 위기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몸을 바쳐 고려를 지켜냈으며, 더 나아가 고려에 대한 끝없는 충절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고려거란전쟁의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하공진의 위대한 공과 그 정신이 많이 전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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