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독재의 끝! 야인시대 이기붕 아내 박마리아 그녀는 누구인가?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것은 불과 수십년전에 불과하며 무엇보다 대한민국 건립이후 이어진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만큼은 큰 오점이었다. 그런데, 이 독재의 끝에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 아내 박마리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박마리아 그녀는 누구일까?
1. 박마리아 출생과 성장
박마리아는 1906년 3월 지금의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고, 아버지마저 일찍 죽으면서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를 키우는 어머니가 목사의 집안에 가정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 목사의 도움을 받아 교회 전도사 역할과 여러 잡일을 도맡으며 근근히 생활해 나간다.
박마리아는 당시 가난했던 여인들이 보통 빠른 혼인을 통해 가정을 꾸리던 것과는 달리 배움과 신분 상승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에, 힘든 와중에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의 도움을 통해 1919년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이곳은 개성에서도 특히 배움을 원하는 여성이 다니는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상당히 교육의 질이 좋았고 기독교학교였기 때문에 박마리아는 기독교의 전도사 역할도 하고 있어 교육비도 면제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생활비에 있어서도 당시 개성갑부 윤치호의 딸과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친해졌고, 이를 통해 생활비까지 어느정도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4년 지금의 이화여대인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는데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나라인 미국과 서구 문물에 대한 우월함에 매료되게 된다,
이화여전 졸업 후 잠시 자신의 모교인 호수돈여고에서 선생님을 하다가 이화여전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후 1932년 마운티 홀리옥 대학, 벤더필트 대학을 졸업하고 피바디 사범대학에서 석사까지 졸업한다. 이후 1932년 귀국, 1935년 이화여전에서 영어를 가리킨다.
그녀는 이때도 이미 공창제 폐지, 금주와 금연과 같은 계몽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었는데, 당시 여성이 이정도의 스펙과 활동을 하려면 친일 재력가정도는 되어야 했지만 박마리아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던채로 태어나고 성장하여 그녀의 온전한 노력과 선택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냈다.
단언컨대, 박마리아는 그 시대에서 그야말로 넘사벽의 스펙은 물론 총명함을 가졌던 0.1%의 여성 인재라 볼 수 있다.
2. 이기붕 아내 박마리아의 친일 활동
1931년,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미국 유학시절 만나 약혼까지 했지만 박마리아가 귀국을 하면서 헤어졌지만 1935년 이기붕이 다시 귀국하면서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후 박마리아는 이화여전 교편을 내려놓고 YWCA연합회에 임원으로 활동한다. YWCA는 한국기독교여성청년회로 당시 드문 여성단체로서 여권 신장과 기독교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한 사회운동단체였다.
그러나 일제가 기독교를 일제화 시키기 위해 탄압을 가함과 동시에 중국침략을 공식화환 일제가 전시체제 합류에 YWCA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여성들은 모두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대표적인 여성 친일운동가였던 YWCA 김활란 회장을 주축으로 박마리아 역시 일제에 타협하면서 본격적으로 박마리아는 친일행각에 나선다.
1938년 조선 YWCA는 일본 YWCA 동맹에 흡수되었고 박마리아는 주요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한다. 이자리에서 박마리아는 조선 YWCA를 일본 동맹에 가입하고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 일본 동맹을 거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선포 자리에 임원으로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0.1%의 스펙을 가진 여성으로서 수많은 친일 강연을 돌아다니며 친일 연설을 일삼았고 여러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가담한다.
박마리아가 친일 발언을 했던 기록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징병력이라는 것은 청화폐하께옵서 내리신 여간한 큰 은사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어린애였지만 이제는 다 성장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시고 총과 칼을 메고 전장에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니까 전장에 나가는 이상 황은(皇恩)에 으거리짐 없이 충용(忠勇)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 혜택에 보은하는 최선의 길입니다(『징병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 『조광』 주최 간담회, 1942년 5월 23일).
여튼 박마리아는 광복이전까지 정신대, 징병제 찬성 등을 독려하는 친일행각을 서슴치 않았고 권력에 대한 불의에 대한 타협과 이를 통한 권력을 만들어갔다.
3. 광복 후 이기붕의 아내로 권력을 휘두르다
양심 없이 친일행각을 저질러오던 박마리아는 해방 후 위기를 맞아야했으나 오히려 권력의 날개를 얻는다. 바로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고 과거부터 연이 있었던 이기붕이 이승만의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때 박마리아는 그놈의 YWCA 문화부장과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를 맡고 있었는데 당시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운좋게 인연이 닿게 된다.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보다 늦게 입국을 하는데, 이때 먼저 들어온 이승만을 돌보던 임영신이라는 여성 정치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프란체스카가 듣게 된다. 그 중 둘 사이가 불륜관계라는 소문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화나게 만들었고 매일 돈암장을 드나들며 이승만을 충성스럽게 보필하던 임영신을 좋지 않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때 박마리아가 나서서 프란체스카의 통역과 비서 역할을 책임지며 임영신을 돈암장에서 몰아내는데 기여했고 이때부터 프란체스카와 친해진다. 특히 프란체스카는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오직 영어로만 소통했으며 이승만과도 영어로 소통하길 원했는데 그 역할을 박마리아가 충실히 해내며 더욱더 프란체스카의 마음을 얻게 된다. 이승만에게는 이기붕이, 프란체스카에게는 박마리아가 찰싹 붙으며 이 부부는 이제 권력의 중심부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1948년,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자 이기붕은 비서실장, 이후 1949년에는 서울시장까지 역임하면서 박마리아 역시 권력을 잡기 시작한다. 1951년 6.25전쟁 당시 국방부장관에 오른 이기붕은 이후 자유당 의장자리에 올랐고 박마리아는 YWCA 회장, 이화여대 문리과 학장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자유당을 장악한 이기붕은 이제 이승만 정권의 영구집권을 위해 이승만의 종신 집권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날치기 통과 시켰고 박마리아는 4백만 여성이 가입한 단체의 회장이 된다. 이를 통해 나이 든 이승만의 뒤를 이어 이기붕이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꾸게 되었고, 이 부부는 이제 권력만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박마리아는 이때부터 자신이 직접 권력과 정치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가 이기붕 부부가 살고 있는 서대문에 있다하여 '서대문 경무대'라고 지칭했으며 이기붕의 호인 만송을 따다 만든 오늘날의 권력형 팬클럽인 만송족도 등장했다.
4. 권력의 몰락, 박마리아 최후
박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자 장자인 이강석을 자녀가 없던 이승만에게 양자로 보낸다. 이승만은 자신이 아들이 없음을 항상 한탄했고 뒤를 이을 아들을 얻길 원했는데 박마리아가 자신의 아들을 이승만에게 입양 보낸 것이다.
이후 박마리아는 더욱 승승장구하여 자신이 이끄는 대한부인회 회장을 연임하고 당시 내노라 하는 권력자들의 부인들을 모두 대한부인회에 가입시키면서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권불십년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에 올리기 위하여 박마리아는 대한부인회 전국 대회에서 이기붕 지지선언을 하게 하였고 이기붕과 자유당은 선거 표 자체를 찍어내는 이른바 3.15부정선거를 저지르며 국민의 분노를 산다.
그리고 마침내 한 달 후 국민이 들고 일어나는 4.19혁명이 벌어지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했으며 박마리아는 이대 부총장 사임과 공직 사퇴, 이기붕의 부통령 사퇴를 가져오게 된다. 이승만은 이후 하와이로 망명을 택했지만, 2인자라며 온갖 파렴치한 불법과 정치 공작을 일삼던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그 어디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이렇게 집마저 쫓겨난 이기붕 일가는 1960년 4월 28일 경무대 비서실에서 이승만의 양자이자 부부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이 권총으로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을 쏜 후 자신도 자살을 하며 최후를 맞게 된다. 이때 이강석의 머리와 가슴 두 곳에서 총상이 있어 타살에 대한 소문도 돌았으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권력에 일생을 바친자들의 최후인 것이다.
박마리아는 가난하게 태어나 오직 성공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불의일지라도 행하며 나아간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최후를 맞고 우리 역사에 어떻게 평가 되는지를 똑똑하게 기억하게 만든 인물이다. 박마리아의 삶과 그 최후가 오늘날 위정자들에게 교훈으로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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