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과 해학이 담긴 유머는 어느 시대건 사랑 받기 마련이고, 세상이 더 힘들수록 인기를 끌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정국에 이르기까지 TV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임에도 오직 입담으로 많은 인기를 끈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야인시대 실존인물 신불출이라는 인물이다. 신불출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또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을까?
1. 신불출의 출생
북한의 개성 출생으로 1907년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본명은 원래 신흥식으로 남측 북측의 기록에는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신불출이라는 특이한 이름은 예명으로 일제강점시 시대를 개탄하며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삶,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했을 삶의 의미를 담아 '不出'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튼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어렸을때부터 온갖 일을 다하며 성장하였고 보통학교를 다니다 자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출생 및 성장에 관련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2. 신불출의 일제강점기 시절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당시의 일제를 용감하게 조롱하던 인물이었다. 당시 활동하던 한 재담가의 공연을 보고 연극의 매력에 끌려 1925년, 18살의 나이로 연극계에 입문한 신불출은 언어유희를 특기로 빠르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일제의 억압과 폭거에 대한 세상 이야기를 만담으로 전하며 주목 받는 인물이 된다. 아래와 같은 언어유희가 대표적 사례인데, 그가 어떤 유머를 구사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약간 힙합 같은 느낌이 있는 것...
“사람이 왜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자(字)라는 것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이는 일본을 뜻하는 ‘왜(倭)’자와 혼동시켜 ‘왜놈을 없애야 한다’는 의미였다. - 신불출 <말씀 아닌 말씀>
이밖에도 신불출은 연극할 때 대본을 따르지 않고 애드립을 통해 당시 시대를 비판하였는데, 하루는 '삼천리 강산에 우리가 연극하는 곳은 모두 일본인의 것이고 우리 극장은 한 두곳밖에 없다며 모두 일어나자'라고 대사를 바꿔 말한다. 이 대사가 끝나자마자 신불출은 즉시 일제에 연행되어 모진 조사를 당하고 연극계를 떠나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난다. 이때가 1930년으로 연극계에 들어선지 불과 5년만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연극 보다는 만담가로 활동하며 서울 외곽 곳곳을 돌며 일제 비판에 나선다. 이때도 그의 주특기인 조롱과 해학을 통해 일제 비판을 나섰기 때문에 일제로서도 딱히 체포할만한 명분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일제의 창씨개명에 저항하며 한자로 '강원요원' 을 짓고 이는 일본말로 바꾸면 '에하라 노하라' 우리말로는 될때로 되라라는 뜻으로 바꾸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성기 녹음 음반을 발매하는데도 나서 단 보름만에 2만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고, 담우회라는 연극 단체를 조직하여 만담이나 희극 등에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희극 운동에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당시 우미관을 운영하던 김두한과 연을 맺게 되었으며 그의 친구 장진영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이끄는 것 역시 신불출이라고 알려져 있다.
3. 신불출의 공산주의 활동
그는 소위 당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자 즉, 아나키스트와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점차 공산주의에 빠지면서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된다. 해방 이후 그는 조선영화동맹이라는 좌익 단체에 가입해 좌익 운동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며 선전선동에 나서게 된다. 그가 일으킨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46년, '신불출 설화' 다시 말해 6.10만세운동기념회때 벌인 태극기 비방사건이다.
그는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에 찬성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극기 중앙 붉은 빛은 공산, 파란색은 파쇼이며 그 주위의 4괘는 소련, 미국, 중국, 영국으로 이 국기를 만들때부터 민족은 반으로 갈리고 4국의 신탁통치를 받게되었고.... 우리 속담에 큰코 다친다는 말이 있으니 더 큰코를 가진 미국이 쫓겨날 것이고... 그야 말로 망언을 늘어 놓은 것이다. (김두한이 신불출에게 총상을 입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김두한의 이야기일뿐 정확하게 사건이 규명되지 않았다.)
이 공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우익청년단체에게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미군에게 구속되었다.
4. 신불출의 월북과 죽음
구속 이후 1947년 월북한 신불출은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그의 재주를 살려 선전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1957년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중앙위원으로 뽑혔으며 북한공로배우가 되기도 한다. 이후 1961년에는 신불출 만담연구소 소장자리까지 올랐지만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정치숙청이 일어나면서 입지가 약화되고 또 대본의 사전검열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이를 비판하기도 한다.
4-1. 신불출 죽음의 두가지 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이 있다.
1) 북한이 주장하는 것으로 자료에 따르면 1967년 갑자기 안면마비가 와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조선희극사' 등을 집필하다가 196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수용소에 있다 탈북한 김영순(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이 말하길, 자신은 신불출과 1972년경 요덕수용소에서 함께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그는 나이는 많았지만 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을 웃기는데 재주가 있었고, 그와 함께 들어온 부인과 함께 지냈다는 증언을 했다. 이후 1975년~76년 신불출은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북한의 기록을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증언에 의지할 수도 없는 대목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명확치 않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겠다. 그의 죽음 이후 1995년 김정일이 신불출의 만담을 거론하면서 그의 희곡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북에서 높아졌고 2009년에는 평양연극대학에서 그의 책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야인시대 실존인물 신불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우리나라 근현대를 주름잡았던 희극인이자 만담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였다면 뭔가 우리나라의 찰리채플린 정도로 알려질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불출 그의 자유로웠던 생각과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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