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일제와 독재에 맞서 싸웠던 인물! 국민대 설립자 해공 신익희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4. 7. 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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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와 독재에 맞서 싸웠던 인물! 국민대 설립자 해공 신익희 그는 누구인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독립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과 6.25전쟁,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까지 이르는 시대만큼이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역동적이고 치열한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난세에는 무수한 인재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 중 해공 신익희 역시 그 인물들 중 하나였다. 신익희 그는 누구일까?

 

신익희

 

1. 명문가 출신 신익희 우수한 교육을 접하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난 신익희는 6남1녀중 막내 아들로 1894년 태어났다. 신익희는 고려시대 태조 왕건을 도왔던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 가문의 자손으로,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이며 가문 자체가 조선에서 주요 벼슬을 도맡아 해온 명문가였다. 때문에 당시 광주 서하리에서 그의 집안은 대표 양반가로써 불려왔다.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익희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때문에 교육에 대한 관심도 쉽게 가질 수 있었다. 신익희는 어렸을때부터 머리가 좋아 학문들을 쉽게 읽혔는데 국민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신익희의 삶이 이때부터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일제에 나라가 넘어갈 위기에 쳐하자 신익희는 어렸지만 교육에 대한 관심을 통해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했으며, 그리고 그가 15세가 되던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진학한다. 이는 당시 영어가 서구의 진보한 학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었다. 이곳에서 신익희는 우리나라가 부강하지 못한 탓에 일제는 물론 서구열강들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더욱더 교육에 매진하였고 한성외국어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몇몇 영국인들이 조선의 학생들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더욱더 민족의식을 키워가게 된다. 

1) 신익희의 일본 유학

신익희가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1910년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집어 삼킨 경술국치가 있던 해로 신익희는 이같은 현실에 망연자실 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가서 선진교육을 배워 일본에 맞서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실제 신익희는 일본 유학기간에도 당시 흩어져 있던 한국 유학생들의 조직을 통합하고 조선학우회를 결성하였으며 기관지인 학지광을 만들어 조선 유학생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서고 이를 통해 항일의식 고취와 독립운동 결속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그리고 신익희가 참여한 이 학우회는 더 나아가 3.1운동의 기반이 된 1919 2.8독립선언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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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신익희
드라마 야인시대에 출연한 신익희

2. 신익희의 독립운동 

1913년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신익희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고향에서 사설강습소 '광동강숙'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계몽과 실력향상만이 우리 민족을 독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후 1917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신익희는 잠시 국내로 돌아와 중동학교, 지금 고려대의 전신이 되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교수 자리를 맡아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 

1) 1919년 3.1운동 참여 

신익희는 1918년 1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지도자들과 모여 독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는데, 이때 신익희는 독립선언을 하고 대규모 군사행동을 일으켜야 궁극적인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1919년 1월 상하이에 방문해 독립운동단체의 현황 등을 살피고 다시 귀국하는 도중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신익희 역시 즉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보성고 제자들과 연락하여 서울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열었으며,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중국 상해로 떠난다. 27년간의 중국 망명생활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2)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우리나라의 민족 지도자들이 모인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지자 신익희는 초기 설계 작업부터 함께 했으며 초대 임시정부 내무차장을 맡게 된다. 참고로 이때 내무총장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에서 실무를 도맡았는데 먼저 따로 흩어진 상해임시정부 조직들의 통신연락망 구축을 위한 연통제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안 초안 작성 등을 도맡으며 각기 따로 떨어진 우리나라 독립 정부를 통합하는데 힘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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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승만에 대한 실망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지만 정부 기능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임시정부 사이에서 독립을 위한 각자의 방향과 생각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외교중심독립, 이동휘 무장투쟁론 등의 갈등이 심했다. 또한 이승만이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1919년 3월 미국특명전권대사에게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고 현 일본의 통치하에서 해방 되는 조치...' 를이라는 문구가 있는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제출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그럼에도 신익희는 무엇보다 임시정부의 현실적인 운영을 위해 사분오열로 흩어진 독립운동가들을 불러 모으는데 힘썼으며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상해로 불러와 겨우 임시정부의 닻을 올렸지만 이승만이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버리면서 신익희는 이승만에게 실망했고 이승만 불신임안을 내는 등 이때부터 이승만과의 악연이 계속되게 된다. 

3) 신익희 좌파무쟁투쟁론에 참여하다 

임시정부가 파행을 거듭하면서 신익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시사책진회 참여 등을 주도했지만 모든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신익희는 한중합작을 통한 무장독립을 통해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중국군벌과 연대하며 독자적 독립의 길을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신익희의 성향은 좌파무쟁투쟁에까지 이르며 한국혁명당 결성을 통한 중국과의 연합한 무장투쟁노선에 강한 드라이브를 건다. 이후 일제가 중국 대륙을 침략하자 더욱더 이러한 생각은 공고하게 되었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등에 동참하며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한다. 

이후에도 신한독립당, 민족혁명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 참여하며 신익희는 독립운동가들의 통합과 무력을 통한 독립에 나서며 좌파무쟁투쟁에까지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신익희의 유년시절부터 배워온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에 대한 생각이 작용된 결과였다. 

4) 다시 충칭임시정부로 

10여년을 좌파세력과 함께 독립무장투쟁운동을 지휘했던 신익희는 그들의 후신인 전위동맹에는 참여하지 않고 다시 거처를 옮긴 충칭임시정부로 떠난다. 이는 임시정부로 통합하여 함께 독립을 위해 나가자는 당시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며 신익희 역시 자연스럽게 이 분위기와 당시 국제 정세에 발맞춰 충칭임시정부로 들어오게 된다. 

 

이후 좌우통합 독립운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하는데 노력하였고, 마침내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시정부가 탄생된다. 그리고 신익희는 1944년 임시정부의 내무부장을 맡게되고, 얼마 후 우리는 해방을 맡게 된다.

 

1945년 임시정부요원 귀국 기념 사진.
1945년 임시정부요원 귀국 기념 사진. 1줄 왼쪽: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3. 미군정과 신익희 

해방 후 미군정이 주도하는 정치환경속에서 신익희는 다양한 국내의 정치 집단 속에서 당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발표한 인민공화국에서 체신부장을 맡게 된다. 참고로 체신부장은 지금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장관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밖에도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인정 받고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공작대를 조직하고 미군정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통치를 김구와 함께 주도하다가 미군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고 감시를 받게 되는 등 진정한 우리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민족주의자적 입장에 서게 된다.   

이밖에도 신익희는 공산주의세력을 향한 백색테러 지원은 물론 우익활동 전면에 나서는 한편 교육 및 계몽활동에 관심이 많았던 신익희는 오늘날 국민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자유신문사 사장, 대한체육협회장, 대한반공연맹 이사장까지 역임하며 해방정국의 주요 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 남한단독정부 구성에 찬성하며 정치가로...

당시 우리나라는 남북한 통일정부를 주장하는 김구 세력과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하는 이승만 세력으로 갈려 있었는데 신익희는 남한단독정부 추진에 찬성하면서도 김구의 생각에도 동조하면서 노력하였지만 대세는 점차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에 신익희 역시 공산화된 북한에 대한 현실을 알기에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쪽으로 기울게 된다. 

4. 이승만 정권의 최대 정적으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과 세력을 달리하면서 범야권의 대표가 된다. 이후 6.25전쟁이 한창중인 1952년, 이승만이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을 못할 것 같자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 개헌으로 바꾸고자 하였는데 이에 이승만 정권은 갑작스러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가둔뒤 직선제 안을 그대로 통과해버리는 이른바 부산정치파동(발췌개헌)을 일으킨다.

 

이 일을 시작으로 신익희는 분노했 완전히 반이승만 세력으로써 정치 길을 걷게 된다. 

1) 신익희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체제가 가속화함에 따라 신익희는 당시 좌익 세력의 거두 조봉암 등과 힘을 모으는 범야권결합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반대하던 극우세력이 이승만정권과 결탁하여 신익희가 한국전쟁 때 납북된 조소앙과 뉴델리에서 밀담하고 제 3세력을 통해 김일성 이승만을 배제한 독자 정권 수립을 한다는 정치 공작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뉴델리밀회사건'이다. 

여기에 1954년 이승만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통과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135명이 찬성하며 정족수 136표에 딱 1표가 모자르며 부결된다. 그런데 자유당정권은 국회의원 재적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라는 논리로 135명이 맞다는 이른바 사사오입 논리를 내세우며 개헌안 가결을 해버린다. 

이 두가지 정치 공작을 겪고 신익희는 이승만 세력에 투쟁하는 반독재투쟁의 거두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1956년 마침내 이승만을 위협하는 대통령 후보로서 선거에 나서게 된다. 이때 신익희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유행이 되었고 신익희의 유세장에는 항상 군중들이 가득찼다. 이대로만 가면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 상황이었다. 대세는 신익희에게 있었다. 

5. 신익희의 죽음

신익희가 이길 수 있다는 여론이 조성되는 사이 신익희 역시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유세를 다닌다. 그러나 하늘이 신익희의 편이 아니었을까? 1956년 5월 5일, 선거를 10일 정도 앞둔 상황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도중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진다. 이후 병원으로 급히 이동했으나 신익희는 사망 판정을 받는다. 신익희의 허망한 죽음 이후 그의 시신이 서울역에 당도했을 때 군중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노와 함께 신익희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효자동으로 진격하다가 경찰의 제지에 1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제 1야당의 후보가 죽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서울에서는 신익희의 추모표가 이승만을 이길 정도로 대단했으며 이같은 선거결과는 추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신익희는 우리의 근현대사 역사의 큰 물결속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인물이다. 독립운동과 신국가건설운동, 반독재민주화운동까지 달려온 현실적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명분보다는 현실가능성 그리고 실용주의를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을 펼쳐왔으며 그의 생각은 오늘날 양 당으로 갈라져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지금의 우리 정치에 큰 교훈이 될 수 있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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