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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라! 독립운동가 이재명 그는 과연 누구인가?

윤여시 2024. 8. 9.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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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라! 독립운동가 이재명 그는 과연 누구인가?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라는 뜻의 매국노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아마 거의 대부분이 이완용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을사오적 중 하나로 대한제국의 왕을 겁박하고 천수를 누렸다고 알려진 인물 이완용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 이재명이다. 이재명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독립운동가 이재명
독립운동가 이재명 (출처: 국가보훈처)

 

1. 이재명 의사의 출생과 성장 

이재명은 평안남도 평양군 평양성내에서 1887년 10월 16일에 태어났다. 사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큰 발자취에 비해서 알려진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그는 1904년 17살의 나이로 대한노동이민회사의 하와이 이민자 모집에 응모해서 이민을 한 사실상 이민 1세대였다. 

새로운 기회와 삶을 꿈꾸며 먼 하와이까지 왔지만, 3년도 채 안되어 그는 다시 조선땅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재명이 하와이 생활이 안맞거나 향수병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7조약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주권이 일제에게 침탈 당하고 식민지화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08년 3월 일제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조선의 일제 합병에 앞장선 미국인 스티븐스를 장인환, 전명운이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재명 역시 그해 바로 조선으로 귀국한다. 어찌보면 그의 새로운 삶에 대한 부푼꿈을 조국의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접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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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완용 암살 계획을 세우다 

고국에 대한 걱정으로 귀국을 했지만 막상 와보니 일제와 매국노들의 행태는 더욱 심각했다. 특히 1909년 매국노들의 집단 모임인 이용구가 이끄는 일진회가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을 주장하는 패악질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은 이재명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2-1. 이재명 동지들을 모으다

1909년 9월 이재명 혼자 매국노들을 모두 처단할 수는 없었기에 평양으로 떠나 자신과 뜻을 함께할 동지들을 찾는다. 당시 평양은 조선의 두번째 수도로 이재명의 고향이자 사람들이 강직하고 애국심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동지를 10명 정도 모은다. 

동지를 모았으니 이제 이재명은 거사에 쓸 의복과 무기들을 모은다. 그리고 변장할 평민 두루마리와 단도와 단총 그리고 탄환 100발을 수집하고 바로 거사날을 잡고자 회의를 한다. 

2-2. 이재명, 거사 계획을 세우다

이재명과 동지들의 타깃은 두명이었다. 앞서 말한 총리대신 이완용 그리고 일진회 이용구가 그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를 먼저 타깃으로 삼아 거사를 치룰까라는 회의 끝에 이완용의 경우 아무래도 경호가 더 강하다보니 이용구를 먼저 암살할 경우 그 경호가 더욱 강력해져서 처단할 수 없다고 판단함에 따라 이완용을 먼저 암살할 것을 정한다. 

그리고 곧이어 이완용이 12월 22일날 명동의 불란서 교회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거행하는 행사가 열리는데 그곳에 참여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재명은 기뻐하며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그날의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3. 이완용 암살 그날의 재구성

이재명은 자신의 동지들 중 이동수, 김병록과 함께 이완용이 행사에 참여한 명동의 불란서 교회의 입구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군밤장수로 위장해 대기하며 이완용이 나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11시가 조금 지나서 추도식에 참석했던 이완용이 정문 앞을 나오자 군밤장수로 위장하던 이재명이 별안간 달려들어 칼로 이완용을 찌르려하자 이를 본 인력거꾼이 막아섰고 인력거꾼을 먼저 찌른 후 이완용을 찔렀지만, 이후 이재명 역시 주위의 일제 순사들에게 포위되어 현장에서 즉시 체포된다.  

당시 영국인 베델이 일제의 침략에 반발하면서 창간한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는 이 소식을 특보로 전하면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완용이 행사를 마친 후 인력거를 타고 78m 정도 갔을 무렵 군밤장수가 나타나 인력거꾼을 8곳이나 찔러 먼저 제압하고 도망가려는 이완용에게 몸을 날려 허리와 어깨 3곳을 찔러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었다. -대한매일신보"

"이완용은 총 3곳인데 어깨에 찔린 곳이 폐까지 닿았고 오른쪽 등에 찔린 곳은 신장까지 닿았으며 1곳은 허리이다. 내부출혈이 있어 생명이 위독하며"

다시 말해 이완용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지만 중상까지 입힌 것이다. 그럼에도 이완용의 목숨은 질겨서 당시 대한의원이라는 가장 최신화된 병원으로 가 대수술을 받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수술이 바로 우리나라 제 1호 흉부외과 수술이었다.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의사는 10년만 빨리 이 사건이 발생했으면 당신은 죽었다고 말할정도였으니 참 아쉬운 결과다. 

4. 이재명의 재판과 조선총독부 제 1호 사형선고

이재명의 기개는 재판정에서도 계속되었다. 이재명은 재판 동안 공범을 묻는 일제의 물음에 자신과 함께한 동지들을 절대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거사에 대한 당위성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범이 있다면 2천만 동포들이 함께했고 방조자는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의 죄를 8개로 나누어 말하기도 했으며, 나라 잃은 슬픔에 대한 억울함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5월 18일 이재명은 결국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1910년 9월 30일 그는 조선총독부의 제 1호 사형인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재명이 사형 받기 전, 한말이 있다. 

"향후 조선에는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 수만명의 이재명이가 나타나서 반드시 일본을 침몰시키리라!"

조선총독부는 이재명을 사형시킨 후 유해마저 알 수 없는 곳에 유기한다. 이후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추서되면서 지금의 현충원에 위패로 모셔지고 있다.

한편 이재명의 암살시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로 17년 동안 폐렴으로 달고 살다가 죽는다. 

매국노 이완용
매국노 이완용

5. 백범일지에서 나온 이재명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는 이재명에 대한 기록이 있다. 김구가 동지 노백린과 황해도에 있을 때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총으로 자신의 아내를 죽이려 한다'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만나게 된다. 

이재명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총을 가지고 매국노를 죽이려 하는데 이 아내가 막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내가 화를 낸것이요"

그러자 김구와 노백린은 "자네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하나 총기로 아내를 위협하고 소문 나게 하는 것은 아직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겠소. 이후 마음이 다 갖춰졌을 때 이 총을 내게서 받아가시오" 하면서 총을 이재명으로 부터 받는다.

그런데 그 일이 있는지 한달도 되지 않아 김구와 노백린은 경성에서 신문으로 이완용이 암살 시도를 받아 중상을 입었고 결단을 시행한 자가 황해도에서 만난 이재명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김구는 탄식하며 이 총을 괜히 받았구나라며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자신의 삶의 목적과 도전보다는 나라에 대한 피끓는 안타까움과 불의에 대한 분노로 거사를 한 이재명, 이재명이 역적 이완용을 찌른 자리는 지금 이재명 의사터로 지금의 명동성당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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