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야인시대 이화룡 실제 인물 분석 드라마 vs. 역사 무엇이 다를까?

윤여시 2025. 6. 1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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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 중후반부 등장한 이화룡은 지금의 명동을 장악한 명동의 황제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북에서 내려와 김두한, 이정재와 더불어 3대 주먹으로 알려진 인물 이화룡 그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 또 실제 인물이라면 야인시대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그의 행적을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1. 이화룡 누구인가? 

야인시대 이화룡
드라마 <야인시대> 이화룡

 

 

이화룡은 1914년 평양 출생이다. 그의 유년시절과 해방전, 이북시절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일제시절 이북의 평양에는 이화룡이 있다고 할 정도로 서울 종로의 김두한과 더불어 주먹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화룡이 우리나라 주먹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북한이 공산화 되기 시작하며 이를 피해 우리나라로 내려오면서부터이다. 그는 박치기로 유명해 박치기왕이라 불리는 등 싸움 실력으로 월등했던지라 이북에서 내려오자마자 빠르게 일제시대 하야시가 점령하고 있다 빠져나가며 비어버린 무주공산 명동에 터를 잡는다. 이때부터 명동의 황제, 검은신사 등으로 불린다. 

또한 그는 공산당이 싫어 고향에서 쫓겨 내려온 만큼 우익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의 특공대장을 맡아 남한 좌익계열을 습격하는 등 반공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1.1 명동파의 이화룡 동대문사단 이정재와 대립하다 

6.25전쟁 이후, 이화룡이 명동에 터를 잡아갈 무렵 동대문에서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힘을 바탕으로 이정재가 빠르게 성장한다. 때문에 두 조직은 묘한 긴장감과 함께 서로를 신경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때 본격적으로 명동파와 동대문이 적대적 관계로 치닫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화룡의 친한 동지이자 이정재와도 연이 있던 시라소니는 자신과 자신들의 부하가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정재의 동대문을 찾아 자주 돈을 빌리곤 했는데, 이를 참지 못한 동대문사단에서 시라소니에게 집단 린치를 가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이화룡은 동대문과의 적대적 관계를 선포하며 두 조직은 준 전시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1.2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 

명동과 동대문 사단이 준 전시 상태에 접어들며 일촉측발에 상황에 돌입했지만 당시 정권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으로 이정재에게 큰 뒷배가 되어준다. 물론 반공활동을 한 이화룡에게도 자유당 정권의 제의가 온 적도 있었지만 이를 이화룡이 거절했던터라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때문에 힘의 균형은 점차 명동을 제외한 전 서울 조직의 연합체였던 동대문파로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명동파의 일부가 배신을하고 자신들의 구역을 동대문에게 바치며 넘어가는 일들이 발생하자 이화룡은 한방을 노리며 동대문을 먼저 쳐들어갈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모여 (당시 서울운동장) 여러 연장을 챙겨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등의 동대문 주요 간부의 집을 습격한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챈 동대문 간부들이 모두 숨어버렸고, 당황한 명동파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다. 이때 이를 수상히 본 경찰의 검문을 받자 명동파 조직원들은 당황하여 순경의 뺨을 때리고 도끼를 투척하고 지프를 타고 도망친다. 

그러나 그들이 던진 무기와 당시 자유당 정권의 보호를 받고 있던 동대문파의 신고로 이들은 모두 검거되었고 이를 주도한 이화룡과 정팔 등 명동파의 주요 간부는 징역 3년형을 받고 구속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화룡은 강제로 조폭 생활에서 은퇴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5.16군사 정변으로 인해 탄생한 박정희 정권이 정치깡패들을 도륙할 때 구속되어 은퇴하게 된 이화룡은 이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정재와 이화룡
동대문 이정재 <좌> , 명동 이화룡 <우>

 

2. 1960년 영화계에 투신한 이화룡

어둠의 세계에서 은퇴한 이화룡은 복역후 출소한 1960년부터 1967년까지 화성영화사를 설립하여 운영한다. 그는 <장희빈>, <주마등> 등 영화를 제작하며 한국 영화사에서도 흔적을 남기게 된다. 당시 임화수가 정부가 주도하는 관제 영화를 찍는 인물이었다면 이화룡은 자신만의 안몫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이니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당시 우리나라의 3대 극장이었던 을지로의 명보극장과 관련이 있어 배급과 제작까지 도맡아 하는 과장 조금 보태서 마치 지금의 CJ와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편 이화룡이 주먹계를 떠나 영화계로 투신하자 그의 명동 조직은 신상사로 잘 알려진 신상현이 물려 받아 운영하게 된다. 이후 다들 알다시피 신상사파는 1970년 중반까지 대한민국의 주먹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튼 제작한 작품들의 명성과는 달리 7년만에 영화 산업에서 떠난 이화룡은 신앙의 길로 접어들어 목사 생활을 하였고 1984년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목사가 된 후 자신의 조폭 시절을 후회하며 참회했다고 한다. 

 


이화룡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나오듯 정치깡패였던 동대문 이정재와 대척점에 서있던 인물이자 한국 영화사에서 나름의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그러고보면 야인시대 속 이화룡은 실제 이화룡과 비슷한면이 많기도 하지만 드라마 속보다 현실이 더 드라마틱했던 이화룡의 모습이 담겨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화룡의 실제 역사속 모습을 알고 드라마를 보면 더욱 흥미롭게 이화룡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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