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하얼빈 의거 이후 이야기! 안중근 이토히로부미 죽인 이유는? 재판부터 죽음까지

윤여시 2024. 12. 23. 16:47
반응형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늙은늑대 이토히로부미에 세발의 총알을 적중시켰고 이토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15분 후 즉사하였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코리아 우레(대한민국만세)를 3번 크게 외친 후 담담하게 일제에게 붙잡히고 만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이후 안중근은 감옥살이를 하며 일제의 편파적인 법원 판결과 맞서게 된다. 오늘은 영화 <하얼빈>이후 안중근이 왜 이토히로부미를 죽여야만 했는지 또 그 재판과정은 어땠고 사형선고를 어찌 받았는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영화 <하얼빈 > 안중근 '단지동맹' 실화인가? : 동의회 국내진공작전까지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연해주 독립운동과 이토히로부미 암살 거사를 조명한 영화 이 개봉한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안중근이 독립의사들과 조직한 '단지동맹' 그리고 여

yoosi0211.tistory.com

 

1.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 죽인 이유는?

안중근_이토히로부미_죽인_이유
배우 현빈이 영화<하얼빈>에서 안중근 역을 맡다.

1.1 안중근 체포 후, 일제 법원으로 넘겨지다 - 안중근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러시아 군사들에게 곧바로 현장에서 체포당하였고 오후부터 즉시 러시아 검사에게 신문을 받게 된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의 관할지역이었기 때문에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땅에서 암살당했다는 점과 그의 경호를 실패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도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러시아는 외교적 판단에 따라 안중근과 우덕순을 포함한 이번 거사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두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넘기게 된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을 심문하거나 재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하얼빈 의거가 명백히 러시아 군대가 관할하는 청나라 영토 하얼빈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안중근은 한국사람이었고 러시아에 체포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해 청나라 영토 안에 있는 한국인은 한국법을 적용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의 '외국에 있는 한국인은 일본 관헌이 보호한다'라는 문구를 통해 러시아에게 강력히 안중근을 넘겨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안중근에 대한 재판권을 갖게 되자 이후 파견나온 일본 검사 미조부치 타카오가 안중근을 신문을 하게 된다. 이때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에 대하여 물어보고 안중근은 다음과 같은 이토히로부미의 죄상을 당당히 밝힌다. 

<이토히로부미의 죄상 15개조>

1.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한국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전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한국 군대를 해산시킨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태평무사한것처럼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트린 죄
15. 일본 천황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이러한 대의명분을 듣게 된 일제 미조부티 검찰관은 안중근을 의사라 칭하며 사형은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응형

2. 안중근 중국 뤼순감옥으로 이송되다 

안중근이 하얼빈 총영사관이 있은지 2달 후, 안중근은 중국 뤼순감옥으로 이송된다. 이는 일제가 일부러 안중근 재판을 뤼순에 있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정하고자 한 것인데, 일본 국내에서 재판을 처리할 경우 국제 여론이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이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당시 재판관 한 사람이 재판을 진행할 수 있으므로 더욱 편하게 일본 마음대로 안중근의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일제는 재판전부터 안중근을 이미 가만 두지 않을 것을 명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뤼순법원과의 조율을 통해 재판전에 안중근을 극형에 쳐해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전달하였고 이를 시행하기로 다짐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재판은 안중근에게 절대 유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안중근이 뤼순감옥으로 간 후 1909년 11월부터 1910년 2월까지 총 33번의 신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안중근은 신문 내내 자신이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에 대해서 당당하게 대답했고 그의 조선 침략 야욕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마침내 재판이 열린다. 일제의 계획대로 1910년 2월 14일, 일제는 안중근을 사형, 우덕술은 징역 2년, 조도선 김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한다. 그리고 1달 뒤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한다.

 

안중근은 자신에게 사형이 구형 되었음에도 상고를 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는 안중근 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편지와 안중근 의사의 뜻이 담겨 있었다.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 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중략)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후 사형을 앞두고 안중근은 감옥에서 자신이 집필하던 <안응칠역사>,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위해 사형 집행만 조금 미뤄달라고 했고 일제는 이를 승낙한다. 그러나 일제는 얼마 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안중근의 사형을 앞당겼으며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이 말했던 천주교 사순일 3월 25일 사형 집행을 요청하였으나 이 역시 순종황제의 탄신일이라 해 3월 26일 집행된다. 

하지만 안중근은 형장에서도 당당하였고 이때 그가 했던 유언은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으로 한일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라는 것이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안중근의 유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안중근의 유해를 안중근의 가족들의 절규에도 돌려 보내지 않았고 뤼순감옥 어디쯤에나 아무렇게나 매장하였다. 이는 안중근의 묘지가 독립운동가들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일제의 만행이었다. 때문에 아직도 안중근의사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 사형 5분전 모습. 하얀색 수의를 입었다.

3. 감옥에서 지은 안중근의 저술 활동

감옥에서도 안중근은 독립에 대한 의연한 자세를 잊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삶과 자신이 생각해온 동양평화 그리고 자신의 정신이 담긴 유묵을 남긴다. 약 5개월의 기간이었다. 

3.1 안응칠 역사 저술

감옥에서 안중근은 자신의 본명 안응칠을 넣어 <안응칠역사>라는 자서전을 쓴다. 자신이 태어나서부터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할때까지의 이야기들을 담담히 담았다. 하지만 이 완성된 원고는 안중근이 죽고 일제에 압수되어 극비로 일제가 한국통치자료로 활용한다. 

놀라운건 안중근의 원고를 본 일제의 고위직들이 감명받아 서로 베껴 보관했다고 하니 안중근이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1969년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안응칠 역사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안응칠역사에는 안중근의 모든 인생이 담겨져 있지만 자신과 함께 했던 전우들의 정보만은 없었다. 일제가 이를 활용해 자신의 동지들을 탄압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3.2. 동양평화론 저술

안중근은 사형 구형 후 항소하지 않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자신이 생각해온 동양평화에 대한 생각을 하나하나 담는다. 

사형을 앞두고 쓴책임에도 안중근의 동양평화에 대한 내용은 지금봐도 무방할 정도로 놀라운 선견지명을 갖고 있는 내용들이다. 또한 일제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물론 안중근이 생각한 일본에 대한 생각이 한계가 없던 것은 아니다. 가령 일본 중심의 동양평화를 이끄는 등의 방안은 그당시 일본이 강대국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안중근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서양 제국주의에 대하여 한중일이 연합하여 막아내고 일제의 침략주의를 걷어내려는 노력은 지금에 대입해도 놀라울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양평화론은 앞서말한 것처럼 일제가 약속을 어겨 안중근의 사형을 빠르게 집행하면서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것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후 행적이다. 그는 큰 사람이었다. 일제의 불공정한 재판과 판결에도 담담히 받아드리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존귀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영화 <하얼빈>을 보고 꼭 그의 더 컸던 순간들을 살펴봤으면 한다. 

 

 

영화 <하얼빈> 안중근 동지 우덕순, 끝까지 함께했던 이유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조선 침탈의 원흉이자 늙은 늑대라 알려진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던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위인이지만, 그와 함께 오랜세월을 함께하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yoosi0211.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