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최재형, 하얼빈의 숨은 영웅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을 이끈 위대한 인물

윤여시 2024. 12. 1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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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던 때, 국내에서 독립운동 환경이 어려워지자 만주와 지금의 연해주 지방으로 넘어간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최재형이다. 그는 노비 출신에서 연해주의 성공한 사업가로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위대한 인물이었다.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와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 최재형, 영화를 보기 전, 그의 모든 인생과 발자취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독립운동가_최재형_영화_하얼빈
영화 <하얼빈>에서 최재형 역을 맡은 유재명

1. 가난한 노비에서 성공한 러시아 한인 사업가가 되기까지

1.1 조선에서 러시아로 가기까지 

최재형, 그는 러시아 이름 표트르 세메노비츠 최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1860년 지금의 함경북도 경원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함경도 지방 지주의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으로 최재형 역시 태어나자마자 노비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최재형이 9살이었던 1869년 함경도 지역이 홍수가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자 노비 생활을 하며 근근히 버텨간 최재형의 집안 역시 생계가 어려워진다. 이때 함경도 지방에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는 비옥한 땅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고 최재형의 일가 역시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어린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를 떠난다. 

그러나 연해주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최재형을 포함한 많은 한인들이 가난과 맹혹한 추위 그리고 차별속에서 지내야했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연해주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은 점차 늘어났고 연해주 지방 곳곳에서 한인부락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러시아 당국에서도 이러한 한인들을 교육하고 관리하기 위해 한인 교육기관 등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하면서 연해주 지방은 한인 사회의 또 다른 한축으로 주목되기 시작한다. 

최재형은 어린 나이때부터 총명했다. 그는 러시아 고용주 밑에서 노동을 하며 연해주 학교를 다녔고, 러시아의 문화와 글을 배운다. 최재형은 11살때, 그를 어여삐 본 한 러시아 선장 밑에서 선원으로 6년간 일을 하며 착실하게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리고 17살인 1877년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조금씩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사업과 장사를 시작한다. 요즘 초등학교 4학년이 돈을 벌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1학년때 자신의 이름으로 가게를 낸 것이었다. 그만큼 최재형은 신분을 넘어 이미 남다른 인물이었다.

1.2 한인 지도자로 성장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어느정도 부를 모은 최재형은 18세인 1878년부터는 러시아 병영의 통역으로 일하기도 하면서 러시아 군정과 치안 활동에 도움을 주며 신망을 얻기 시작한다. 1884년 당시 연해주 정부는 군용도로를 건설하고자 당시 많은 조선 노동자들을 참여시켰는데 이때 최재형은 항상 조선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러시아 정부에 항변하며 당시 한인 사회에서도 많은 신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신임과 명성을 바탕으로 당시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 정부의 허가하에 한인 자치기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이때 책임자로 최재형을 임명한다. 이는 당시 조선 한인사회는 물론 러시아 내부에서도 최재형이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최재형이 당시 연해주 지방의 관리로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가 직접 최재형에게 훈장을 수여 할 정도였다. 여튼 이때 최재형은 책임자로 있으면서 한인사회의 교육 증진에 무엇보다 많은 힘을 쏟았다. 이것이 1895년, 그의 나이 불과 35살의 일이었다.

1.3 최재형 자산가가 되다 

1896년 조선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러시아는 더욱더 조선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때 최재형 역시 연해주 한인사회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되고 조선과 연해주 한인 사회를 위해서는 많은 물적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해서 최재형은 당시 연해주 지방에 머물던 러시아 군대를 상대로 막사 건축, 연료 상품 물류 등 많은 사업을 진행하였고 1904년 러일전쟁 등과 같은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수물품사업을 통해 막대한 재력가로 성장한다. 

가난한 조선의 노비가 40대에 이르러서 막대한 러시아의 자산가가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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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립운동가 최재형 모든 것을 바치다

2.1.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나서다

최재형은 연해주 지방에서 자신이 모은 재산을 통해 독립운동에 나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최재형은 우리 민족의 교육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은 물론 러일전쟁을 계기로 의병 육성에도 전격적으로 나선다. 

1905년 그의 나이 45세에 당시 연해주지방의 의병을 이끌던 이범윤에게 물질적 지원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급변하는 연해주 정세 속에서 최재형과 이범윤이 이끄는 연해주의 의병은 힘을 모아야 한다는데 동의 하였고, 1908년 연해주 지방의 의병 세력들이 모인 동의회라는 독립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때 안중근 역시 최재형 부대의 우영장으로 여기에 포함되게 된다. 

이들은 최재형의 집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총장 자리에 최재형이 부총장 자리에 이위종이 선출된다. 동의회는 앞서 말한 것처럼 러시아지역의 항일의병세력의 결집이라는 큰 의미를 갖고 있었으며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은 거의 절반 이상을 최재형이 책임졌다. 

2.2.  안중근과 함께한 국내진공작전

1907년 일제의 국내 군대해산 명령이 떨어지자 당시 연해주 지방의 의병들은 분개하였고 이들은 강을 건너 함경도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들어간다. 이른바 국내진공작전의 시작이었다. 연해주 의병은 북한의 북부 몇개 도시를 장악하고 일본의 소규모 군대를 궤멸시키는 등 초반에 많은 성과를 기록한다. 특히 1908년, 안중근이 우영장을 맡은 최재형의 동의회, 이범윤의 창의회는 두만강 연안 신아산 부근 홍의동을 공격하였고 일본 군대에 피해를 끼치며 교전에서도 승전보를 올린다.   

하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인한 전력차이로 독립군은 회령 영산에서 패배한 후 국내진공작전의 기세가 꺾였으며 이 실패를 계기로 최재형 이범윤의 갈등이 심해지고 연해주 의병은 갈라지기 시작한다. 

2.3. 최재형과 안중근 

국내진공작전과 그 이전부터 함께 해온 동지였던 최재형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많은 후원을 한 인물이다. 안중근은 이미 연해주 지방을 넘어왔을 때부터 자산가였던 최재형에게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국내진공작전 이후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에 있어 많은 논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거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안중근의 의거를 찬양하는 기사를 내는 등 직간접적으로 안중근을 도왔다. 

1911년 일본의 한 첩보자료에는 안중근의사의 거사 이후 동생인 안정근, 안공근이 최재형의 집에 출입한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참고로 안중근 의사는 최재형을 “믿을 수 있는 형님 같은 존재”라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최재형_실제모습
최재형_실제모습

3.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이후 최재형 독립 활동 

1910년대 최재형은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최재형을 죽이기 위해 러시아 정권과 이간질을 시키는 첩보활동을 벌였으나 러시아가 최재형에 대한 신임이 높아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최재형은 자신에게 오고 있는 위협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인 신문을 창간하여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키고 연해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의 회장을 맡아 각종 계몽활동과 한인 인권을 위해 노력하며 항일운동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선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최재형은 러시아 한인을 뭉치게 하는 인물이자 대표자로써 발돋움 하였으며 한족중앙회, 친러한족회 등의 민족의 대표자로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요주의 인물로 남게 된다. 

3.1 최재형의 순국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에서 최재형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일제의 군대가 위협의 대상이 되는 연해주 지방으로 진격해오기 시작했고 최재형은 가족을 떠나 한인 빨치산 부대에 무기를 공급하고 일제에 대항하기 시작하는 의병활동을 이어간다.

 

하지만 1920년, 최재형의 나이 61살에 일제의 군대가 연해주 지방을 대대적으로 공격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요주의 인물이었던 최재형을 즉각 체포한다. 사실 최재형은 혼자의 몸이라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으나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여 체포 된 것으로 체포 된지 얼마 후 일제의 총에 순국하게 된다. 참으로 허무한 민족지도자의 죽음이었다. 

이후 그의 가족들 역시 연해주 지방에 있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흩어졌고, 소련의 억압정책에 많은 가족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정부는 최재형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연해주 우수리스크 집은 독립운동기념관으로 만들어졌다. 


최재형 그는 노비로 태어나 러시아의 자산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모은 막대한 부를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쓰지 않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모두 바쳤으며,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도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발자취를 기억하며 그의 숭고한 인생에 감사함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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