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영화 <하얼빈 > 안중근 '단지동맹' 실화인가? : 동의회 국내진공작전까지

윤여시 2024. 12. 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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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 연해주 독립운동과 이토히로부미 암살 거사를 조명한 영화 <하얼빈>이 개봉한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는 안중근이 독립의사들과 조직한 '단지동맹' 그리고 여러 항일 전투 등이 나오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크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와 역사속 동의단지회라 불리는 단지동맹의 실제 이야기를 알아보고자 한다. 영화를 보기전이나 후에 이 글을 보면 더욱더 뜻깊게 다가올 것이다. 

1. 단지동맹(동의단지회) 이란 무엇인가?

영화_하얼빈_단지동맹
영화 하얼빈에서 묘사된 단지동맹

 

단지동맹을 알아보기 전, 안중근 의사의 항일 발자취와 역경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중근 하면 떠오르는 것이 하얼빈에서의 늙은 여우 이토히로부미에 대한 암살이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안중근 의사는 우리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왔던 사람이다. 

1.1 배경 : 단지동맹의 전신 '동의회의 탄생'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야욕이 가속화 되기 시작하면서 일찍부터 국내에서 민족 계몽을 위한 교육과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며 여러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점차 일제의 방해와 탄압 그리고 한반도 병합이 가속화되자 안중근은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1907년 정미7조약(우리나라 군대해산) 등이 진행되면서 간도와 연해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생각하게 된다. 

1907년 8월, 북간도 지역으로 넘어간 안중근은 처음에는 민족계몽운동에 초점을 두고 교육 등에 초점을 맞춘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간도지방까지 넘어온 일제의 침탈로 인해 한계를 느끼고 그해 10월, 연해주 지방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의병활동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을 변화하게 된다. 

당시 연해주 지방에는 여러 의병 집단이 존재하였으나 모두 흩어져 있었으며 단일 명령체계가 없었다. 안중근 역시 이러한 상황에 한계를 느끼고 연해주에 흩어져 있던 여러 독립의병운동자들과 교류하였고 그 중 최채형의 조카인 엄인섭, 평양출신 김기룡과 함께 연을 맺고 의거를 모의한다. 이후 연해주지방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면서 의병들의 힘을 모으자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안중근의 노력은 물론, 당시 연해주의 의병운동가들의 한계에 대한 고민이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이들이 모여 1908년 4월 연추지역의 최재형 집에서 연해주 의병운동자들이 모여 독립연합단체를 만드는데 힘을 합치니 이것이 바로 '동의회' 이다. 

<동의회 주요 참여자>

안중근, 최재형, 이범윤, 엄인섭, 김기룡, 이위종, 전제익, 이승호, 백규삼이다. 총장은 최재형이며 부총장은 당시 창의회를 이끌고 있던 이범윤이었다. 동의회 창설은 이위종의 아버지 당시 주러공사 이범진이 1만루블을 독립운동에 쓰라며 아들에게 주고 최재형이 사재 1만 3천 루블을 지원, 한인 모금 6천루블이 모여 자금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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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의회' 실패로 끝나버린 국내진공작전 

동의회에서 안중근은 연해주의병을 이끄는 우영장을 맡았다. 당시 의병편제에서 우리 의병은 우영장, 좌영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안중근은 우영장 자리를 맡았다. 그만큼 동의회에서 핵심 간부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1908년 7월 국내진공작전으로 명명한 두만강을 건너 우리나라로 진격하는 의병활동 작전이 수행된다.

2.1 동의회 국내진공작전  

1908년 7월, 당시 우리나라 본토에서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연해주의 동의회 역시 이를 지원하고 국내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일제에 본격적으로 타격을 줄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7월 3일 해상과 육로를 통해 두만강을 건너 진격할 계획을 세운 동의회는 약 1천명 규모의 군대로 국내진공작전을 시행한다. 

안중근 역시 자신의 부대를 끌고 러시아 포시에트를 떠나 두만강을 건넜고 약 10km 떨어진 홍의동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여기서 일제 척후병  약 4명을 사살하였고 곧장 북상하여 신아산까지 진출한 후 일제 헌병분대를 습격하였다. 이때 기습을 당한 일본군 5명은 행방불명에 1명이 전사하였다. 

그런데 이때 행불 처리된 일본군은 실제 안중근에게 붙잡혀 있었는데 안중근은 포로로 잡힌 적군은 죽이지 않는다는 신념 아래 일본군을 풀어준다. 그러나 이러한 안중근 행위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은 불만을 품고 이탈 하였고, 합류한 엄인섭 부대 역시 불화를 겪으며 연해주로 귀환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의동과 신아산에서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안중군 의병을 잡기 위해 병사들을 급파하였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안중근과 우덕순 부대는 더욱더 내륙으로 남하한다. 그러나 회령군 영산에서 일본군의 유인과 기습을 받으면서 안중근 부대는 참패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동의회는 뿔뿔히 흩어져 버리게 되니 안중근 역시 9월이나 되서야 일제의 눈을 피해 겨우 연해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영화 <하얼빈>에서는 해당 전투들이 한 겨울로 나오지만, 실제는 여름에 벌어진 전투였다. 안중근의 기록을 봐도 장마비가 쏟아져 강을 건너는데 극심한 고초가 있었다고 전한다. 

3. 단지동맹(동의단지회)의 탄생 

안중근의 단지동맹 동지들이 함께한 혈서 엽서 (실제 태극기는 단지 후 나온 피를 통해 그렸다.)

 

동의회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이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는 안중근이 동지들과 만든 단지동맹이 있었다. 

3.1 단지동맹의 탄생 배경

1908년 11월, 안중근은 의병활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연해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공작전의 실패로 식어버린 의병의 열기를 다시 살리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안중근은 다시 한 번 의병활동에 불꽃을 살릴 단체를 조직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는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동의회의 뜻을 이어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독립 비밀결사단체를 만드니 이것이 바로 동의단지회 이름하여 '단지동맹'이다.

 

기록에 따르면 연해주 한인 순방 직후, 안중근은 자신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이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을 자른 후 태극기 전면에다 혈서로 '대한독립' 네 자를 쓰며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하는데, 이는 단지동맹이 명백히 동의회의 뜻을 이어받은 것임을 뜻한다.  

단지동맹에 참석한 인물은 물론 그 맹세일까지도 사실 명확치 않다. 이는 하얼빈 거사 이후 일제의 모진 심문 속에서도 안중근이 철저하게 자신의 동지 이름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러가지 진술 자료 등을 토대로 살펴 볼 때 단지동맹회가 만들어진 날은 1909년 2월 26일이며 참여 인물은 안중근, 김기룡, 강순기, 조응순, 황병길, 백규삼, 갈화천, 강창두 8명이며 나머지 4명은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진 않다. 

이들은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로 단지동맹은 안중근을 중심으로 조국의 독립 회복과 동양평화를 이룩하는데 초점을 두고 맹세하며 탄생하게 된다. 

3.2 단지동맹과 하얼빈의 관계 - 실제 역사에서 단지동맹이 하얼빈 의거를 기획했을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단지동맹 자체가 하얼빈 의거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거나 직접 실행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를 단지동맹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실제 역사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는 하얼빈 의거에 실제 단지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우덕순을 비롯한 인물들이 주축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실제 단지동맹 인물들은 한명도 하얼빈 의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하얼빈>에서는 우덕순(베우 박정민)이 단지동맹에 참여했다고 나오지만 역사 기록에서는 그렇지 않다. 

또한 단지동맹 탄생 자체가 단순한 요인 암살 및 보복의 차원으로 목표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하얼빈 의거를 단지동맹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오히려 안중근 의사와 단지동맹의 위대한 결성 의의에 훨씬 부족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단지동맹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안중근과 동지들이 함께 세웠던 '일심단결을 통한 독립운동의 실천'이라는 맹세가 안중근으로 하여금 하얼빈 의거를 실행하게 한 중요한 원천이자,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영화 <하얼빈>에서 등장하는 단지동맹(동의단지회)의 탄생배경과 실제 탄생 그리고 이를 통한 하얼빈 의거에 연결되는 역사적 가치 부분을 살펴보았다. 영화에서처럼 하얼빈 의거가 단지동맹이 주축이 된 점에서는 실제 역사와 분명한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단지동맹을 맺을 당시의 숭고한 가치가 결론적으로는 안중근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소중한 씨앗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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