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깡패가 개입했던 시절, 어두웠던 1950년대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혼란 그자체였다. 그 중 독재 자유당정권과 결합하여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이권에 개입했던 이정재의 동대문파는 악명이 자자했는데, 이정재의 동대문파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화랑동지회 유지광은 이정재의 오른팔로 화랑동지회라는 조직을 이끌며 많은 정치범죄를 저질렀던 인물중에 한명이다. 오늘은 화랑동지회 유지광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아보며 역사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1. 유지광의 이력과 이정재와의 관계
유지광은 1927년, 경기 이천 출생으로 동대문 이정재와 동향출신이다. 더욱이 유지광의 형과 이정재의 고모가 결혼을 하면서 사돈관계로 맺어졌으며 이정재에게는 유지광이 고모부의 동생이기 때문에 존대를 해야하는 관계였다. 훗날 조직에서 자신의 아래이자 10살이나 많았던 이정재가 유지광에게 사돈이라 칭하면서 높임을 해주었던 이유기도 하다.
유지광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표현된 것처럼 나름 명석함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였다. 그는 다른 깡패들과는 다르게 단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갑종장교(학사장교) 출신으로 임관 중위로 제대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군인으로 복무할 당시 그가 모시는 상관으로부터 신라시대 화랑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때부터 화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훗날 화랑동지회라는 자신만의 조폭부대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유지광은 군대에서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자신의 또 다른 상관을 폭행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 겨우 처벌을 면하고 전역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2. 유지광, 깡패의 길로 들어서다
1952년 즈음하여 이정재의 동대문시장파가 결성 된 후, 그는 당시 이승만의 경호처장인 곽영주의 비호 아래, 자유당 정권과 연을 맺으며 급속도록 조직이 커지기 시작한다. 참고로 곽영주 역시 이천 출신으로 유지광과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1955년, 그의 부하였던 김동진이 배반을 하면서 이정재가 이석재를 시켜 단성사(영화관) 앞에서 김동진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1956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더욱더 세력확장이 필요했던 동대문 이정재는 서대문파 최창수, 종로파의 심종현과 연합 하는 삼우회를 결성한다. 이때 이정재가 군을 제대하고 절에 들어가 쉬고 있던 유지광에 건달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권유하였고 유지광은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건달세계로 뛰어든다.
2.1 1957년 장충동집회방해사건의 주동자가 되다
유지광이 삼우회 소속이 된 후, 동대문 이정재와 자유당은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특히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3선 대통령이 되는데는 성공하지만, 이승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하려던 이기붕이 부통령을 되지 못하고 야당에 내주자 자유당은 위기감을 느끼고 선거법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개정하는 한편, 야당의 정치 공세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탄압하는데, 이때 행동대장으로 나선 것이 바로 이정재와 동대문사단이었다.
이들은 정치에 절대 해서는 안되는 폭력테러까지 시도하기 시작한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57년 5월 25일, 장충동집회방해사건이다. 당시 야당은 장충동에서 자유당 정권의 독재에 맞서 거리로 나아가 국민들 앞에서 시국강연회를 열며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체제를 비판하려 한다. 이때 이정재가 야당의 대표였던 조병옥이 연설하지 못하도록 말그대로 깽판을 놓고 테러를 가할 계획을 세운다.
이 날, 조병옥이 자유당을 비판하며 연단에 서자 정체모를 갑작스러운 괴한들이 등장하여 유리병, 플라스틱 물통 등을 던지고 연단에 올라 책상과 의자를 부수며 휘발유를 뿌리는 등 난동이 일어난다. 이때 야당의 경비책임자였던 김두한이 홀로 막아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시국강연회를 경호하겠다고 한 경찰들은 이미 깡패들과 작전모의를 한 듯 사라져버린다.
무방비상태에 놓인 야당을 향한 폭력적인 이 정치테러는 장충동집회방해사건으로 알려지며 후에 언론의 취재로 이정재의 명령을 받은 유지광이 주동자로 드러나게 되었지만 유지광은 검경의 비호 덕분에 죄를 부인하다 여론에 밀리자 처벌을 받는 척하며 재판을 받고 징역 8개월이라는 짧은 감옥생활을 한다.
정치적인 정당 활동에 말도 안되는 폭력사태가 등장하는 이 사건때문에 유지광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3. 화랑동지회 유지광
장충동집회방해사건 이후 동대문의 이정재는 서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자신의 사돈 유지광을 중심으로 새롭게 단체를 조직하도록 하는데, 이것이 바로 화랑동지회였다.
훗날 유지광이 제공한 화랑동지회 조직도에 따르면 화랑동지회는 총 700명으로 이정재, 조열승, 임화수를 축으로 하며 그 밑에 수많은 깡패 부대를 거느리는 큰 조직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깡패조직이었음에도 개최되는 날 서대문 경찰서장이 축하를 보낼만큼 합법적인(?)단체였으며 화랑동지회라고 적힌 검은색 단복을 입고 이정재의 직인이 찍힌 단증을 받는 등 나름 체계적인 단체였다.
유지광은 화랑동지회의 멤버들을 구성하기 위해 원정을 다니며 전국의 주먹과 머리를 잘쓰는 나름의 건달 인재들을 모으러 다녔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아니면 자유당 정권의 비호 덕분인지 화랑동지회는 전국을 대표하는 조직이 된다.
4. 이정재의 몰락, 유지광 반공청년단의 행동대장이 되다
이정재는 자유당 정권에서 권력에 부합하며 자신의 오랜 꿈인 국회의원의 꿈을 자연스럽게 꾸게 된다.
그는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고향 이천에서 출마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여 이천 표밭을 다지며 민심을 얻는다. 그의 노력 덕분에 출마만하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으나 뜻밖의 비극이 펼쳐진다.
바로 당시 자유당 정권이 민심을 잃으면서 대표인 이기붕이 국회의원 당선마저 어렵게 되자, 갑작스럽게 이정재의 지역구인 이천을 출마지로 옮기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정재와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이정재는 국회의원의 꿈을 포기하고 자유당에 등을 돌리게 되는데, 이 틈새를 비집고 이정재의 자리에 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임화수였다.
임화수는 이정재보다 더욱더 자유당에 밀착하여 권력을 휘두르고자 하였으며, 이정재의 사단을 그대로 물려받아 더욱더 조직화하였다. 유지광의 화랑동지회 역시 이 일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임화수의 아래로 포함되게 된다.
4.1 반공청년단의 탄생과 유지광
자유당 정권이 민심을 잃어가면서 자유당은 더욱더 독재를 향한 꼼수를 부리게 된다. 그들은 온갖 조직들을 동원하여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전국의 주먹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단체를 만든 것이었다. 이 단체가 바로 그 유명한 반공청년단이었다.
자유당은 반공청년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선거에 활용하려 하였고 청년을 규합하며 노골적으로 야당의 선거를 방해한다. 임화수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조직을 반공청년단에 소속시켰고, 자신은 반공청년단의 서울시단 종로구단 단장이 되고 유지광과 화랑동지회로 하여금 동대문 특별단부를 이끌게 한다.
4.2 4.18 고려대 학생 시위 습격사건
반공청년단은 지속적으로 야당의 선거를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그들의 선거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들은 전국 곳곳에서 야당의원들을 비난하고 모함하며 헐뜯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선거법은 개나 줘버린듯 무시했으며 폭력을 동원하거나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등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었다.
유지광과 화랑동지회에게도 반공청년단의 부정선거에 대한 지령이 지속적으로 내려오며 선거에 불법 개입하는데 각종 역할을 한다.
이러한 폭력을 동원한 불법선거와 3.15 선거 당일 투표용지까지 갈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자유당 정권에게 국민들은 들불같이 일어서며 전국은 삽시간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분노를 토하기 시작한다.
한편, 서울에서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끝없이 열리게 되고 4월 18일, 고려대생들은 이날 주축이 되어 시위를 전개하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한다. 그런데 이들이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도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을 지나갈쯤 되었을 때, 갑자기 깡패 3,40명이 뛰쳐나와 학생시위대를 길거리에서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날 습격으로 40명의 학생들과 사진기자 등이 부상당하게 되는데, 이 사건의 주도자가 바로 반공청년단의 임화수와 유지광이었다.
물론 추후 누가 이 습격을 지시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임화수와 유지광의 진술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이 둘 모두 이 습격사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참여한 것은 여러 증거들을 볼 때 확실해 보인다.
5. 5.16 군사쿠데타와 유지광의 죽음
4.19혁명 이후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이를 등에 업고 권력을 누리던 정치깡패들은 곧바로 법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특히 온갖 부정선거 활동과 정치에 개입하였던 이정재는 물론, 4.18 고대 습격사건을 주도한 임화수와 유지광을 비롯한 정치깡패들은 곧바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몇년을 처벌받고 감옥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1961년 5.16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박정희의 군정이 들어서면서, 민심을 얻기 위한 군정이 정치깡패들을 강력한 처벌방침을 정하게 되고 이들의 재판은 속전속결로 다시 진행되게 된다. 이때 4.19혁명 당시 고대생을 테러했던 임화수와 유지광은 중형에 처해질 위기에 쳐하게 된다.
재판에서 임화수는 시종일관 이정재와 유지광에게 책임을 돌렸고 유지광은 자신이 모두 행한일이며 임화수가 시킨 일임을 자백한다.
1961년 8월 21일 피고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임화수는 '고대생 습격사건에 관련 되어 있으면 자신이 사형을 받겠다며 자신은 문화사업을 하느라고 이정재 등에게 피해만 받았으며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있다고 말함'
유지광은 '고대생 습격사건의 8할이 임화수 책임이며 반공청년단에서 저지른 사건을 화랑동지회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1961-08-22-
이러한 재판 끝에 이정재, 임화수, 곽영주, 유지광은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유지광은 어찌된 일인지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된다. 유지광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이유에 대해서 당시 박정희가 유지광이 자신의 보스 이정재에게 충성된 모습을 보인 것을 듣고 감형해줬다는 소문도 있지만 이보다는 깡패들의 법 집행에 있어 너무 과한 형이라는 여론이 있어서 대표격인 인물만 사형에 쳐하고 대부분을 감해주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5.1 유지광의 죽음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유지광은 이후 징역 15년 감형을 받고 5년 6개월을 모범수로 살다가 감옥에서 나왔으며, 이후 1974년 이천으로 내려가 지하수 사업, 유통업 등 여러 사업을 한다. 그는 이러한 사업을 하면서도 이정재의 묘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서고 이천지역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을 찬양하거나 혹은 일본의 우익단체와 함께 자신의 조직을 재건하려는 등의 노력을 한다.
이후 1988년 자신의 고향 후배 주례를 서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니 그의 나이 61세에 불과했다. 당시 그의 장례식장에는 같은 동대문파이자 이정재와 6촌관계였던 이천 동향 이석재를 비롯해서 신상사파 신상현 일본 야쿠자들도 찾아왔다고 한다.
화랑동지회 유지광... 그는 우리 현대사의 어두웠던 순간을 잘 보여주는 인물 중 한명이다. 그의 조폭 활동이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처럼 미화되서는 안되어야겠지만, 나름의 조직에 대한 충성과 신의가 있던 사람인 것은 어느정도 맞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그의 인생과 발자취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고 또 우리 정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을 해왔는지 곱씹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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