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현대

영화 <하얼빈> 안중근 동지 우덕순, 끝까지 함께했던 이유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윤여시 2024. 12. 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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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침탈의 원흉이자 늙은 늑대라 알려진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했던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위인이지만, 그와 함께 오랜세월을 함께하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도왔던 동지 우덕순은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실제 역사속 이야기와 영화 <하얼빈>에서 배우 박정민이 역할을 맡은 안중근의 동지 우덕순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 안중근 동지 우덕순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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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얼빈> 우덕순 역의 배우 박정민

1.1 우덕순의 출생과 성장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다)

우덕순은 1879년 안중근과 동갑으로 지금의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가 어린 나이에 경성으로 넘어와 서당을 다니며 글을 뗐다. 

이후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동대문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다 1905년 그의 나이 27살에 일어난 을사늑약을 계기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년뒤인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 연초행상(담배장사)을 하며 독립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우덕순이 초기 연해주 독립활동 때 상인과 독립운동을 함께 병행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독립자금에 대한 그의 필요성이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2. 우덕순 안중근을 만나다 

2.1 안중근을 만나게 된 계기 

우덕순이 안중근을 만나게 된 계기를 알기 위해서는 1906년 당시 연해주 지방의 우리 독립의병 환경에 대하여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연해주의 독립의병은 크게 두 인물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바로 이범윤과 최재형이다.  

이범윤은 조선 왕족 출신으로 일찍이 간도에 망명하였다가 일제의 간섭이 시작되자 연해주 지방으로 넘어와 활동을 하고 있었고 최재형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로 넘어와 성공한 자산가로 이들은 신분과, 독립의병의 운영 방식에 대한 다른 생각 때문에 각기 나눠져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연해주 지방으로도 일제의 야욕이 가속화 됨에 따라 이들은 힘을 합쳐 군대를 끌고 조선으로 진격하는 이른바 '조선진공작전'을 합심해서 계획하게 된다. 

이때 우범순은 이범윤의 휘하에 있었으며 안중근은 최재형 부대의 우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때 우범순과 안중근은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뜻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영화 <하얼빈>에서는 단지동맹회에 우덕순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사실은 아니며 우덕순은 안중근과 국내진공작전과 하얼빈 의거를 함께한 동지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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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덕순, 안중근과 하얼빈 의거를 계획하다 

3.1 하얼빈 의거 배경 

최재형, 이범윤의 국내진공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안중근과 우범순 역시 최선을 다해 전투하고 몇몇 전투에서 승전보도 울리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패퇴를 하였고, 우덕순은 의병활동 중에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사형까지 언도받지만 탈옥하여 연해주로 넘어가 다시 독립활동을 모색하던 중 1909년 9월 이토히로부미의 만주행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안중근 역시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이후 자신들의 동지를 모아 동의단지회라는 독립단체를 구성하고 독립 방향을 모색하던 도중 이토히로부미의 만주 방문 사실을 확인한다.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하고 자신의 뜻과 함께 해줄 자금과 동지를 찾게 된다. 특히 자신과 함께할 동지는 자신이 믿고 신뢰를 줄 수 있을 만한 인물이어야 했다. 

안중근은 자신과 국내진공작전을 함께 하며 인연이 닿았던 우덕순을 떠올리고 1909년 10월 20일, 우덕순의 숙소로 찾아간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함께 자신이 계획한 하얼빈 의거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우덕순은 주저 없이 참여할 것을 맹세한다.

 

2024.12.02 - [국사/현대] - 영화 <하얼빈 > 안중근 '단지동맹' 실화인가? : 동의회 국내진공작전까지

3.2 하얼빈 의거 진행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과 우덕순은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 그들은 하얼빈으로 가던 중 중간역인 뽀그라니치아에서 러시아어 통역을 위해 유동하를 데리고 하얼빈에 도착한다. 그들은 유동하의 사촌집에서 머물며 이토히로부미의 만주 방문을 확인하였고 또 다른 동지였던 조도선과 함께 세부 계획을 논의하고 자신들의 결의를 다지는 '보구가'라는 노래를 지으며 이발을 하고 사진을 찍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후 10월 23일, 이들은 이토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기 전 행선지가 될수 있는 채가구역도 답사하며 우덕순, 조도선을 배치하기로 하고 하얼빈역에 안중근을 배치하기로 한다. 어느 한 곳에 이토히로부미가 오면 바로 암살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10월 26일인 거사 당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숙소의 문을 러시아인이 잠궈버리면서 채가구역을 방문한 이토히로부미의 암살을 실패한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거사에 성공하게 된다.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곧바로 체포되었고 채가구역에 있던 우덕순과 조도선 역시 체포되어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징역 3년형을 받게 된다. 

 

하얼빈 의거 4일전, 안중근(왼쪽), 우덕순(가운데), 유동하(오른쪽)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찍은 사진

4. 하얼빈 의거 이후 우덕순의 독립활동 

그가 감옥에 들어가고 1917년까지 우덕순의 행적은 밝혀진게 없다. 1917년 이후 그는 독립을 위한 기금모금과 독립을 위한 각종 정보 수집 등을 하였고 하얼빈 한인사회에서 중심 인물로 활동을 하였으며 또한 각종 교육 활동 등에 참여하여 민족운동 활동을 하였고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장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여러 활동을 진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또다시 1925년 이후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우덕순의 활동은 찾아볼 수 없다. 

4.1. 우덕순은 친일파 변절자? 

한때 우덕순의 이름이 일본총영사관에서 1925년 6,175엔을 받아갔다는데서 발견되며 친일이나 일제 변절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특히 1925년 이후 우덕순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우덕순의 그 동안의 민족운동노선을 보았을때 변절은 쉽지 않으며, 1934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된 자료에서 우덕순을 배일사상을 갖고 있는 인물로 표현한 것이 있고 해방 이후 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우덕순을 동지로 인정했다는 점, 또 지속적으로 일제의 감옥에 갇혔다는 기록 등으로 우덕순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은 입증된 상태다.

5. 해방이후 우덕순의 활동과 우덕순 죽음 

치치하얼 감옥에 갇혀있던 우덕순은 일제 패망이후 풀려나 1945년 12월 귀국한다. 당시 동아일보고 우덕순의 귀국을 '안중군 의사의 유일한 동지'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낼정도였다. 그는 이후 '의사안중근동상건립기성회', '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 등을 운영하였고 대한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내며 정치에도 도전하였다.

1946년 그는 안중근의사 순국 37주기 추도준비회를 열었는데 이때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수많은 거물들이 참석하였고 이는 안중근기념사업회로도 이어졌다. 또한 부녀신문을 창간하여 당시 억압받고 교육 받지 못하는 한국 여성을 대변하는 신문을 창간하기도 한다. 

이후 그는 우익과 좌익의 끝없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반공민족진영에서 활동하였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대한국민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하고 우덕순은 서울에 있다가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해 9월 평양형무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에 나온 것으로 사실확인에 있어서는 조금 필요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북한 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우덕순이 1968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우덕순은 안중근 의사의 영원한 동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얼빈 의거에 있어 안중근과 함께 했던 그의 헌신과 역할은 우리가 꼭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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