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에서 이성계의 의형제, 조선 개국공신 청해 이씨 시조 이지란 그는 누구인가?
여말선초 이성계에게 항상 그림자 같이 나오는 아우가 한명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지란, 여진족 출신으로 오랑캐라 불리며 조선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지란 그는 과연 어떻게 이성계의 하나밖에 없는 아우이자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이지란의 출생과 가문
지금의 함경남도 동쪽에 위치한 북청에서 살던 여진족 족장이자 몽골의 천호 벼슬을 하고 있는 아라부카의 아들로 태어난 이지란은 원래 쿠룬투란티무르, 조선말로 퉁두란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후 이성계의 성인 이씨를 따랐을 때 이지란과 이두란 두가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지란의 청해 이씨 족보를 따라 가보면 남송의 명장 악비가 억울하게 죽고 그의 5남 악정이 북으로 올라와 여진족행세를 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후손이 이지란이라 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지란이 살고 있는 고려 동북면 지금의 함경남도는 몽골, 고려, 거란 할 것 없이 다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때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 역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이성계의 조상 이안사는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항복을 하여 몽골에게 천호 벼슬을 받은 인물로 이안사의 고손자가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 하겠다.
|이지란 이성계를 만나다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놀라운 활솜씨를 뽐내며 함경도 땅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 같은 명성은 말타고 활쏘는 기마민족인 몽골, 여진족에게 삽시간에 퍼졌고 이는 이성계보다도 4살이 많았던 당시 퉁두란에게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퉁두란의 대결을 통해 둘은 마치 서부의총잡이처럼 활을 통해 자웅을 겨루게 된다. 뭐 현실에서 가능할 법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록에 따르면 서로 활을 쏘는 대결을 하다가 이지란의 화살을 이성계가 모두 피하면서 퉁두란이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선 중기 홍만종이 쓴 <순오지>에서는 이성계를 질투한 퉁두란이 뒷간에서 큰일을 하고 있는 이성계에게 활을 쐈는데, 이성계가 한손에 화살을 들고 뒷간에서 나오면서 퉁두란이 항복을 하며 평생 이성계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날아가는 화살을 잡았다는 것은.. 음.. 믿지는 못하겠지만 여튼 어떤 만남을 통해 이지란은 네살 아우인 이성계에게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것은 사실이다.
|이지란 '황산대첩'에서 이름을 남기다
이지란이 이성계의 충복이자 개국공신으로 우리 역사속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의 무공이 유독 빛을 발하며 남겨진 기록이 있다.
바로 1380년, 우왕 6년 9월에 이성계와 함께 왜군을 박살낸 황산대첩이다. 고려말 유독 들끓던 왜군이 전함을 500여척이나 이끌고 경상, 충청, 전라를 살육 약탈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를 끌고 왜선을 박살낸다. 그런데, 퇴로를 잃고 우리 땅에 남은 1만명이 넘는 수많은 왜군은 더 날뛰며 우리 국토를 어지럽히게 된다.
고려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이성계를 보내게 되고 이때 이지란이 함께 출전을 하게 된다. 왜구는 유리한 지형을 자리잡아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을 맞이하게 되고 이성계가 돌격하며 그대로 왜군을 박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왜군은 거의 단신으로 돌격해오는 이성계에 총공격을 하는데 이때 이지란이 자신이 이끄는 직속 여진 기병과 활로 이성계를 보호하며 왜군과 싸워 나가기 시작한다.
이후 악명이 자자했던 왜구의 장군 아지발도를 이성계가 화살로 투구를 벗기고 이지란이 곧바로 활을 쏴 얼굴을 맞춰 죽여버리니 사기를 잃은 왜군은 고려군에게 몰살 당한다. 이것이 바로 황산대첩이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말 달리고 사냥하는 재주야 있는 사람이 있지만, 싸움을 하며 적군을 무찌르는데는 이지란만한 인물이 없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지란 용맹하기만 했을까?
이지란은 드라마 등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단순히 북방 사투리를 쓰고 용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이지란의 비문에 따르면 우왕이 사냥을 떠났을 때, 이성계도 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는데 이때 활쏘기 시합이 열린다.
이성계가 불쑥 튀어나가 과녁을 쉽게 맞추니 우왕은 놀라 이성계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이지란이 '재주가 있는 것을 다아는데 어찌하여 남에게 보이십니까'라고 직언을 했고 이성계는 아차 싶어 그때부터 활을 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성계의 명망이 높아지면서 권력 앞에 은인자중하라는 것을 이지란이 신중하게 짚었던 것이다.
| 조선 건국 후 왕자의 난때 이방원을 돕다
조선이 건국되고 1등 개국공신 청해백에 봉해진 이지란은, 이후 1차 왕자의난과 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좌명공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로인해 자신의 형님 이성계와 평생 딱 한 번 다른길을 걷게 되는 이지란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벼슬을 내려놓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아무래도 이지란은 자신의 부귀영화 때문에 이방원을 도왔다기 보다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에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후 이지란은 죽을 때, 자신이 살았던 함경남도 북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으며 그래서 그의 묘는 지금 북청 땅에 있으며 태조의 묘정에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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