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극적인 소년 군주 고려 창왕 그는 누구인가?

윤여시 2021. 12. 1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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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비극적인 소년 군주 고려 창왕 그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극적인 소년 왕을 뽑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으레 자신의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어야만 했던 조선의 단종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자신의 신분마저 부정 당하며 바로 죽어야만 했던 왕이 있다. 그가 바로 고려의 창왕이다.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창왕의 출생, 8살에 왕위에 오르다 

창왕의 이름은 창으로 우왕의 제 1비였던 근비 이씨와의 사이에서 1380년 태어났다.

 

모두가 잘알고 있듯 8년 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통해 아버지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 세력을 몰아내면서 집권하게 되었고 고려 왕실은 그야말로 망국의 흐름을 타게된다. 본래 이성계는 우왕을 몰아내면서 사돈지간이기도 했고 머나먼 왕족 중 한명이었던 정창군 왕요(훗날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를 즉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함께 위화도회군을 한 조민수는 물론 당시 조정의 존경을 받고 있던 이색이 우왕의 아들 창왕을 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우왕의 어린 아들 창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창왕의 나이 불과 8살이었다.  

 

|어린 창왕의 1년 집권

창왕의 나이도 어렸지만 이미 조정은 이성계 세력에게 넘어가 있었기에 사실상 그는 그냥 앉아 있는 마네킹에 불과 했다. 여기에 창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를 왕으로 세웠던 조민수, 이색 등이 모두 이성계 세력에게 탄핵 당해 조정을 떠나면서 창왕의 의지 할 곳은 그 어떤 곳에도 없었다. 

여기에 이성계 세력은 고려의 기득권 즉,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박살내기 위해 급진적인 토지 제도 개혁을 들고나와 창왕에게 들이밀었고 토지개혁 역시 시행된다. 이와중에 자신의 아버지이자 폐위당한 우왕을 강화도에서 지금의 여주로 유배지를 옮기고 최영의 이성계 세력의 사형 주장을 받아들여 사형을 시키도록 한다.

 

이와중에 당시 고려를 괴롭히던 왜구의 주요 거처였던 지금의 쓰시마섬을 정벌케 하기 위해 박위에게 군사를 주어 쓰시마섬을 정벌하기도 한다. 

|폐가입진, 창왕 폐위당하다

창왕이 무얼 하든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성계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어린왕 창왕을 내쫒을 빌미만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왕이 오른지 1년 정도가 되었을 무렵인 1389년 11월 우왕의 복위를 꾀한 김저, 정득후 등의 모반이 밝혀지며 이성계는 마침내 폐가입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게 된다. 폐가입진이란 가짜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몰아낸다는 뜻으로 창왕의 아버지인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우창비왕설>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니, 당연히 그 창왕 역시 왕씨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 소문으로만 돌던 내용을 조정에서 공론화를 시킨 사건이었다. 우왕은 포악한 행동들은 물론 요동정벌이라는 그릇된 판단을 명분 삼았으나 8살의 소년왕 창왕을 내쫒을 명분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창왕의 폐위는 물론 우왕은 아예 폐왕의 지위까지 날아간다. 이후 폐위되어 지금의 강화도 살창리 마을에 유배를 당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창왕

|창왕 죽다

1389년, 유배 당한 창왕은 강화도에서 참수에 처해진다. 즉 사약을 받은 것이 아닌 칼에 참수를 당한 것이었다. 우왕 역시 강릉에서 참수형에 처해지니 망국의 군주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지금도 우왕은 물론 창왕의 묘지는 찾을 수 없어 그들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창왕의 나이 불과 10살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은 왕이었다. 여기에 죽어서도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불리며 왕씨 왕창이 아닌 신창으로 불렸으며 반역자에 올라 시호 역시 받지 못해 그냥 그의 이름대로 창왕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어린 창왕이 무슨 반역이겠냐만은 그만큼 역사란 것은 망국의 왕인 것을 떠나 어린 소년에게 처참했다. 

사실 고려의 충신 정몽주 역시 폐가입진, 우창비왕설에는 동조를 했던 듯 보인다.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 일파의 행동에는 어떤 대응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란 것은 믿기 힘든 사실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진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 아니라는 증거도 찾기 힘들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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