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태종 이방원의 사돈이되다! 명나라 황제를 감복시킨 문장가 권근

윤여시 2021. 12. 19.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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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사돈이되다! 명나라 황제를 감복시킨 문장가 권근

여말선초는 한치도 알 수 없는 시대였고, 난세에 영웅이 많이 나오듯 유난히 인물들이 쏟아졌던 순간이었다. 그중 고려의 주요가문 중 하나인 안동권씨의 후손으로 그 능력 하나로 고려는 물론 조선에서도 인정 받고 후에 태종 이방원의 사돈이자 세자의 스승 역할을 맡기도 했던 인물이 있다. 권근 그는 과연 누구일까?

 

 |권근의 출생, 벼슬에 오르다

1352년 태어난 권근은 고려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 중 하나인 안동권씨의 후손이다. 그의 가문에서 나온 대부분이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벼슬살이를 했으며 권근 역시 태어나서 이러한 가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가 어린시절 증조부 권보와 권보의 사위 이제현에게 수학하며 학문의 기초를 닦은 권근은 1368년 18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다. 이때 고려는 공민왕 때로 과거에 급제한 권근을 본 공민왕이 '저렇게 어린 아이가 급제 했느냐?'라도 되물을 정도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에 입학한 권근은 당시 성균관의 이색, 정몽주 등 고려를 대표하는 스승들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더욱 성장한다. 즉 천재가 훌륭한 집안교육과 천재 교수들로 이루어진 학교교육을 받은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권근

 |고려말 권근의 활동

망국 고려에서 권근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등 주로 학문과 관련된 직책을 수행했다. 또한 고려의 권문세족에 대항하는 신진사대부로써 역할도 나름 한 것으로 보인다.


1375년, 당시 고려 조정을 잡고 있던 이인임 등이 망해가는 북원(원나라)과의 외교를 다시 시작하려 하자 정도전, 이숭인과 함께 상소를 올려 반대했다. 이때 정도전, 이숭인 등은 유배를 떠났고 권근은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유배에서는 제외된다. 그럼에도 권근은 우왕에게 고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상소를 올려 우왕의 부족한 국정 운영을 지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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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은 이색, 정몽주를 스승으로 모시고 가까웠기에 1388년 실권을 잡은 이성계 세력과 부딪히기 시작한다. 특히 우왕이 쫒겨나고 그 아들 어린 창왕이 스승 이색의 주도로 즉위하자마자 이성계 세력은 조준을 필두로 하여 토지제도 개혁을 들고나온다. 그러나 권근은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 세력의 토지제도 개혁을 반대한다. 

 

또한 명나라에 외교와 관련하여 다녀오는 과정에서 명나라 외교문서에 우왕을 신돈의 아들이라 칭하며 그아들 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아 있자 대책을 세우도록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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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권근의 행동으로 인해 결국 이성계 세력의 눈안에 들고 탄핵을 받아 1389년 유배를 떠나게 되고 여러 곳의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권근은 유배중에도 성리학의 초보자들이 입문하는데 꼭 보면 좋을 <입학도설>을 저술한다. 입학도설은 조선의 성리학이 근간이 되며 후에 퇴계이황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여튼 권근은 1390년 유배가 풀렸지만 조정에 복귀하지 못하고 지금의 충주 양촌에서 은거생활을 하는 도중 고려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드라마 육룡이나르샤 권근

 |조선, 정계에 복귀한 권근 - 명나라와의 외교마찰을 해결하다

조선이 세워지고 이듬해인 1393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새로운 수도를 찾기 위해 지금의 계룡산으로 왔다가, 권근이 양촌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권근을 부른다. 이미 망해버린 고려가 아닌 새로운 나라 조선에서 뜻을 펼칠 것을 결심한 권근은 왕명을 받아들였고, 정종의 신도비명을 지어 올리며 태조를 따라 한양으로 오게된다.

1396년 태조 5년, 권근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이 발생한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였던 홍무제는 조선이 명나라로 보낸 표문과 전문의 문구가 경박하다며 분노하고 조선이 보낸 사신을 억류하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 외교문서를 만든 정도전을 명나라로 당장 압송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에 조선에서는 정도전 대신 권근을 필두로 김약항, 정탁 등을 보내게 된다. 

 

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외교력을 발휘하며 홍무제에게 표전문의 경위를 잘 설명하며 외교마찰을 막아낸다. 또한 권근은 명 태조가 내린 시제에 대한 응제시를 24편이나 지어 올리면서 명나라 황제에게 '학문이 노련하고 성숙하다'라며 극찬을 듣기도 했으며, 명나라 황제가 직접쓴 어제시 3편을 받는다. 

이후 권근은 명나라 수도를 돌며 당시 조선의 성균관 역할을 했던 명나라 문연각을 방문하고 명나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이 일로 권근은 조선의 공신반열에 올랐고 태조 이성계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해동명적>에 쓰여진 권근의 필적

 |권근, 태종 이방원과 함께하다 

1398년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난을 일으켜 정몽주를 척살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권근은 태종 이방원의 세력에 서게 되는데 아무래도 권근의 학문적 입장이 태종 이방원이 꿈꾸는 조선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권근의 대표적인 저서인 <오경천견록>은 군신간의 엄격한 위계질서를 지지하는데 이는 태종 이방원이 바라는 바였고 곧 학문적 명분이 될 수 있었기에 이방원은 권근을 중용했다. 또한 자신이 죽인 정도전 못지 않은 성리학자로 앞으로 조선의 학문을 이끌어갈 인재였기 때문에 조선의 관학을 교육하는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이방원은 적극 지휘한다.

권근은 또한 태종 이방원의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도록 1400년(정종 2년) 사헌부 대사헌으로써 모든 사병의 혁파와 중앙 군영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탄핵하는 등 이방원의 명분이 되었다. 

 

또한 권근은 과거제도에 관한 부분도 혁파하기 시작한다. 단순 암기하는 시험 형태를 폐지하고 논점에 대해 논술하는 지금의 논술법을 과거제도에서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소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교육에서 소학을 먼저 가르칠 것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등 조선 성리학의 근간을 만들게 된다. 

이를 통해 권근은 태종이 바라는 왕권강화와 조선 성리학의 기틀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이방원이 왕이 되자 좌명공신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와 자신의 아들 길창군의 혼인을 통해 사돈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정몽주의 신원에 나서기도 했으며 양녕대군의 스승이 되는 등 그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가감없이 발휘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권근 묘소

 |권근의 죽음

자신의 모든 학문적 지식과 조선 초 조정의 역할을 한 권근은 1409년 태종 9년에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더난다. 그의 묘는 1444년 세종 26년에 지금의 충북 음성군으로 이장되었으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권근은 조선 성리학의 대표 주자답게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끼친 <입학도설>, <오경천견록>외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재편집하고 자신의 역사에 대한 의식을 추가한 <동국사략>을 편찬하였으며 권근의 선조인 권보와 권준 부자가 중국의 효행설화를 모아 편찬한 <효행록>을 보다 쉽게 주석을 붙여 간행하였고, 이밖에도 명나라 황제가 극찬했던 그의 글 실력을 살려 쓴 수많은 시문을 <양촌집>에 묶어 편찬하기도 했다.  

 

그의 친손자는 세조의 최측근 중 한명인 권람이며 외손자 역시 세조의 수하이자 명문장가인 서거정이다. 또한 우리에게 행주대첩으로 잘 알려진 권율이 그의 6대손으로 후손들 역시 조선의 역사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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