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자신의 이복형에게 목숨을 잃은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

윤여시 2021. 12. 2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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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복형에게 목숨을 잃은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 

이성계를 통해 조선이 세워진 이후, 이성계 자식들은 물론 신하들 사이에서 그 후계에 대한 치열한 정치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무수한 예상을 깨고 조선 최초의 왕세자에 지명된 것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방석이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선택에 대한 댓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곧바로 형제들끼리 피튀기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방석은 누구였고 왜 무수한 형들을 내치고 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드라마 정도전 이방석

 |이방석의 출생과 서열

이방석은 조선이 세워지기 딱 10년전인 1382년,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태어난다. 

이성계는 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죽음)에게서 우리가 잘알고 있는 이방우, 이방과(정종),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다섯째) 다섯명의 아들을 얻었고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으로 이방번, 이방석을 얻었다. 즉 이방석은 아무리 잘해도 왕위와는 거리가 먼 순서였다. 

|이방석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나? 

출생의 서열과 나이, 그리고 조선이 세워지는 가운데서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불철주야 목숨바쳐 노력했던 자신의 형들을 제치고 어떻게 이방석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딱 두가지이다. 

 

육룡이나르샤 이방석

첫 째, 조선 초 신권과 왕권의 가치관 대립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권(신하의 권리)이 왕권(왕의 권리)을 이긴다는 것은 곧, 역모를 의미했지만 조선 초 사회는 달랐다.

 

신권주의를 외쳤던 인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설계자이자 이성계의 책사 역할을 한 삼봉 정도전이었는데 그는 조선을 세우면서 이제까지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볼 수 없었고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새로운 차원의 국가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계획이 있었다.

 

정도전은 재상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조금의 과장을 보태면 마치 지금의 입헌군주제와 같은 정치구조를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다 이성계는 정도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정도전의 판단에 대해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정도전이 구상한 계획은 하나 둘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바로 이방원의 아들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이방원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왕이 모든 권력을 갖고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보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정도전으로서는 이방원을 비롯한 이성계의 아들들에 대한 견제를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둘 째, 신덕왕후 강씨의 욕망 때문이었다.

 

1392년 조선이 세워지자마자 세자 책봉에 대한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왔고,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 얻은 이방우(첫째), 이방원(다섯째)이 세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신임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들 그중에서도 이방석을 세자로 올리고자 했다. 때문에 이성계의 책사 정도전과의 협력을 우선시 했고 정도전 역시 자신이 꿈꾼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라도 다 큰 한씨의 아들보다는 아직 어리고 잘 모르는 이방석을 세자에 올리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고 판단을 내렸다.

 

더군다나 같은 강씨의 소생으로 그 형 이방번은 정도전, 조준 등에게 성질이 경솔하다고 찍혔기에 세자자리를 반대했던지라 이성계의 막내 이방석은 쟁쟁한 형들을 제칠수 있었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을 때는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였던지라 빠른 결정이 필요했고 이러한 이유로 이방석은 10살의 나이로 결국 세자자리에 오른다. 

 

|이방석, 사병혁파로 불난집에 부채질하다

1392년 8월 조선이 세워지고 1달만에 세자 자리에 오른 이방석으로 인해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분노를 참지 못한다. 조선을 세우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10살 동생이 세자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더욱 못참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발생하는데 바로 사병 혁파였다. 아무리 조선이 세워졌다지만 고려말부터 계속되어온 개별이 거느리는 사병은 분명 왕권에 큰 부담이 되었다. 

 

특히 이성계 역시 자신의 사병인 가별초를 통해 조선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당시 왕자들이 데리고 있던 사병들은 새롭게 왕위에 오를 이방석과 정도전에게는 무서운 대상이었다.

이에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 정부 즉, 이방석이 모든 병권을 장악해야한다고 했다. 여기에 1396년 명나라가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 삼아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라는 요구를 해왔고 이에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명나라와 한 판 붙기로 하면서 요동정벌론이 다시 그 고개를 들게 된다. 본인들이 요동정벌을 반대한다며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아놓고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이었다. 

여튼,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명분삼아 왕자들의 사병을 모두 중앙군으로 흡수하려 하였고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은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여 거사를 일으키기로 모의한다. 여기에 신덕왕후 강씨가 1396년 죽으면서 이방석의 세력이 약해진 상황이어서 조선 왕실은 피바람이 불기 직전으로 치닫게 된다.

|1차왕자의난과 이방석의 죽음

정도전이 내세운 사병혁파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은 모두 궁을 떠나야 했으며 이는 정도전이 주장하는 신권의 세상이 열림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이방원은 이를 용서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막는 장애물은 항상 무참히 박살내고 정면을 돌파한 인물이었고 대의나 명분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398년 8월 25일, 이방원은 난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난 무인정사이다. 이방원과 그 형제는 자신들의 힘을 한번에 모았고 하륜, 이숙번을 비롯해 자신의 부인 원경왕후 민씨의 세력들까지 
총집결시킨다. 

 

이후 곧바로 제일 없애야 할 정도전 일파를 급습하여 모조리 척살한다. 이때 정도전은 남은, 심효생 등과 만나고 있었는데 이방원이 한번에 척살한 것이다. 이후 곧바로 이 모든 것의 화근이라 생각한 동생 이방석을 죽이러 궁궐로 쳐들어갔으며 이방석을 잡아 폐세자 시킨 후 귀양을 보내다 죽였다.

 

이때 이방석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사실 이성계는 기울어진 대세 속에서 이방석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믿고 궁에서 내보냈으며 매달리는 세자빈에게도 '그래도 자신의 동생을 죽이기야 하겠느냐'라고 말하며 위로까지 해주었다고 전하는데 귀양길에 자객에게 형 이방번과 함께 죽고 만다. 

이방원이 실권을 잡은 후 곧바로 이방석은 서자로 격하 당했으며 신덕왕후 강씨 마저 거의 후궁급으로 격하시킨다. 그러다 일말의 죄책감때문인지 소도군으로 올렸다가 숙종때에 이르러 의안대군으로 추증된다.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이방석 묘

의안대군 묘는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을 이방석의 양자로 입적시켜 후사를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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