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조선

정조는 독살을 당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에 대한 증거와 아쉬움

윤여시 2021. 12. 29.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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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을 당했다? 정조의 죽음과 독살설에 대한 증거와 아쉬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세손 시절부터 목숨에 위협을 끊임없이 느껴야 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암살시도를 비롯하여 많은 위험을 겪어야 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성군이라 불리는 개혁군주 정조의 치세가 계속 됨에도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한은 수원 화성을 비롯해 다양한 개혁정책을 시도하게 하여 영조대부터 권세를 유지하려는 일부 권신들과 영조의 아내이자 정조의 할머니뻘인 정순왕후 김씨 등에게는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조는 재위 24년만에 갑자기 죽게되는데, 그로인해 정조가 독살을 당했다는 독살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홧병이 있었던 정조       

정조가 승하한 1800년은 정조 재위 24년이었고 나이는 49살이었다. 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6월 14일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정조에게 종기가 났는데 이때 내의원을 불러 말하길 '두통이 많이 있고 등쪽에서 열이 올라왔으며 이는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하고 자기마저 죽이려 했던 노론을 왕이 되어서도 없애지 못하고 정사를 논하고 있으니 홧병이 정조를 평생 괴롭혔던 것이다. 

|연훈방 처방 - 6월 25일 (치료 11일 ∼ 12일차)

처음 종기로 진찰을 받은 6월 14일 이후 다양한 약을 써보며 병세가 나았다 심각해지기를 반복한 후 6월 25일 수은을 주성분으로 하는 민간요법인 연훈방을 처방 받는다. 이 연훈방 요법은 정조가 죽은 뒤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데 연훈방을 건의한 심인이 노론 강경파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록에 의하면 정조에게 연훈방은 2~3회밖에 사용되지 않았을뿐더러 수은에 중독되면 으레 보이는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기록에 없었기에 연훈방만으로는 정조의 독살설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은 맞지만 정조의 치료에 노론 강경파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할만하다. 

정조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출처: 경기도청)

|정조의 정신이 혼미해지다 - 6월 26일 (치료 13일 ~ 승하 하루 전)

연훈방을 사용한 후 정조가 잠에 들었을 때 피고름이 터져 정조의 잠자리에 번질 정도였다고 하니 정조와 신하들은 병세에 차도가 있다며 기뻐했다. 

 

이후 6월 26일 경옥고 처방이 되는데, 이때 경옥고를 강권한 것은 노론 강경파 이시수였다. 경옥고는 인삼이 들어가는 것으로 정조의 경우 홧병이 있어 몸이 뜨겁고 어릴때부터 유독 열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인삼이 들어가는 약을 싫어했다. 때문에 정조는 경옥고를 거부했다가 연훈방 처방 이후 몸이 좋아진 것 같자 또 다시 이시수가 경옥고를 권하였고 이를 정조가 받아들여 먹게 된다. 

 

그러나 이후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고 6월 27일,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정사를 챙겼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의 승하 - 6월 28일,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다. 

 정조가 승하하는 6월 28일, 정조의 병세는 위독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정순왕후 김씨다. 정순왕후 김씨는 이시수가 '인삼차에 청신환을 개어서 끓인 것'을 정조가 먹지 못한다고 말하자 본인이 직접 받들어 올린다며 모든 신하들을 물러보낸다. 

 

이후 대전에 정순왕후 김씨만 들어간 이후 얼마 후, 정조는 승하한다. 때문에 정조실록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은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이날 유시(오후 5~7시)에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는 다소 두루뭉실한 기록만 남아 있다. 

|정조 독살설 증거 1. 정순왕후 김씨와 노론의 부활

정순왕후 김씨는 세손인 정조와 사이가 좋은 인물이 아니었다. 정순왕후 김씨는 15살의 나이로 66살의 영조와 혼인한 뒤 자신의 가문인 경주김씨 세력과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뒤 김씨의 동생 김귀주를 유배보냈는데 그는 10년 후 귀양지에서 병사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집안에 정조가 원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정조가 죽으면 정조의 아들인 11살 순조를 대신하여 자신이 섭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본인이 직접 약을 먹이겠다며 정조의 임종장면을 혼자 봤다는 부분은 분명 독살설을 제기할만한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케 한다. 

 

실제로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 김씨는 자신의 죽은 동생 김귀주를 이조판서로 추증하였고 살아있는 자신의 일족을 다시 불러드렸다. 이는 또한 당시 정조의 눈치를 보고 있던 노론의 부활을 알리는 결과를 낳았다. 

|정조 독살설 증거 2. 정조가 바랬던 남인의 몰락

정조가 병으로 몸져 눕기 약 20여일 전, 그러니까 1800년 5월 30일, 연석에서 정조는 100년을 집권해 오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까지 손을 댄 노론 벽파에 대한 마지막 경고를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시대 상황에 따라 의리가 달라지는 점과 인물을 등용하는 문제를 말하게 되는데 쉽게 말해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에 관여했던 모든 인물들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을 하는 한 편, 자신이 키워왔던 친 정조파였던 남인(체제공, 정약용, 이가환 등)을 재상에 임명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를 오희연교라고 하는데, 노론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절망에 빠지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오희연교는 앞서말한 것처럼 정조가 갑자기 죽으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또한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김씨의 세상이 되자 노론강경파와 함께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유배 보내게 된다. 명분은 사학을 잡겠다는 명분이었으나 정조가 키워온 남인들을 축출하는데 이를 활용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정조의 죽음은 분명 정조의 꿈을 접게 하고 100여년의 조선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노론의 치세를 이어가게끔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알린 김조순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쉬운점 

정조 시대는 농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분제 해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고 세계적으로는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그야말로 혁신과 개혁의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정조는 이러한 사회의 흐름을 받아드리며 사회체제의 개혁을 수용하려한 왕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소수의 지배층 노론벽파가 다시 한 번 실권을 휘어잡으며 폐쇄된 조선을 만들어냈고 정조의 모든 개혁정책과 인재발굴은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마저 시작되며 조선은 극단적인 수구체제로 접어들게 된다. 다시 말해 세계의 흐름과 정반대되는 암울한 선택의 연속을 조선이 하게된 것이다. 이는 곧 조선을 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더 나아가 일제치하에 접어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렇기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정조가 살아 있었다면, 최소 10년을 더 이끌고 갔더라면, 그 아들 순조가 장성했을 때 왕위를 물려 받았을까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정조의 독살설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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