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의 처참한 패배를 맞이한 거란 명장 소배압 그는 누구인가?
고려의 거란과의 3차 대첩은 두 나라의 국운을 건 당시 동아시아의 전세를 바꾸는 엄청난 전쟁이었다. 알다시피 이러한 전란 중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희, 양규, 강감찬 등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 고려왕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고려를 침략한 거란에도 명장은 있었다. 바로 소배압이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소배압의 가문
소배압은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황후의 일족으로 다시 말해 왕실의 외척이었다. 거란 황실은 상당히 특이한 형태였다. 당시 거란은 고려처럼 외척이 계속 바뀌는게 아니라 외척인 술률씨를 고정해놓고 황족인 야율아보기의 야율씨와 지속적으로 혼인을 한터라 당시 거란의 권력은 사실쌍 야율씨와 술률씨의 연맹으로 만들어졌다.
이 술률씨는 추후 소씨가 되면서 소배압이라 불리게 된다. 여기서 소배압의 동생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서희에게 탈탈 털린 소손녕이며 소배압은 자신의 장녀를 거란 성종과 결혼시키고 성종의 여동생과 자신이 결혼하면서 그야말로 장인과 매제를 함께 하는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소배압의 출생
소배압은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거란 역사서인 요사에는 968년 등장한다. 2015년 소배압 장녀의 무덤이 출토되는데 장녀가 970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어림잡아 소배압의 출생연도는 950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소배압 거란의 명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우다
소배압이 귀주대첩에 참패 당한 인물이라고는 하나 거란에서는 나름의 명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거란 황제 성종이 즉위한 983년 그는 황제 친위군 장군으로서 조복(몽골 부족중 하나) 원정에 성공하였고 986년에는 북송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만들어내는 한 편 산서 지역의 영토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이후 북송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다양한 전쟁경험을 쌓았으며 거란군의 명장들인 야율사진, 야율휴가와 함께 쳐부수며 그 명성을 알린다. 이후 990년에 이르러 송나라와의 전투를 잠시 휴식하며 고려를 눈독들이기 시작한 거란은 소배압에게 동쪽지역의 총괄 직책을 맡긴다.
1004년, 거란은 20만 대군으로 송나라를 짓쳐들어간다. 송나라의 많은 성들은 모두 함락되기 시작했으며 거란은 송나라의 수도 개봉까지 단 100km를 남겨 놓을때까지 깊숙히 진입한다. 이에 놀란 송나라는 거란에게 화친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때 당시 총사령관을 맡은 소달름이 송나라 복병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소배압은 급히 이를 대신하였고 송나라에게 전연의맹을 이끌어내면서 소배압은 송나라와 관련된 모든일을 도맡는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이때 거란 역사서를 살피면 '소배압의 통치는 온후하고 관대하여 백성들의 지지하였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그야말로 재상으로서 이름을 날린다. 물론 이는 그가 고려와의 전쟁에 참여하기 전까지만 말이다.
|소배압의 처참한 패배 귀주대첩
1010년 거란의 성종이 고려의 2차침입을 감행한다. 이때 소배압을 총사에 임명하게 된다. 거란은 4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의 개경까지는 함락했지만 고려 양규장군의 끈질긴 후방교란과 고려군과의 전투로 인해 거란군은 그야말로 진을 빼고 후퇴한다.
특이한건 거란에서 소배압은 나름의 공을 세웠다고 인정하며 오히려 난릉군왕에 봉하고 1013년에는 재상직까지 겸하며 1016년에는 동평왕까지 봉해지며 탄탄대로를 걷긴 걷는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전쟁보다는 내치에 힘쓰며 거란의 발전에 힘을 보탠다.
2차 거란 침입이 끝이나고 1017년까지는 거란과 고려는 나름 크고작은 전투를 치렀으나 고려가 이를 잘 막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1018년 12월 거란은 10만 대군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귀주를 침략한다. 이것이 바로 거란의 고려 3차 침입이며 이때 총사령관은 소배압으로 그의 나이 70살이었다.
소배압은 2차 고려침입에서 경험을 되살려 이번에는 전격적으로 개경으로 내달린다. 고려 수도 개경을 빠르게 점령하고 왕을 잡아 고려를 정복하고자 한것이다. 그러나 이때 고려 현종은 2차때처럼 나주로 몽진하지 않고 개경에 남아 수성전을 준비하고 강감찬의 고려는 소배압의 뒷덜미를 잡는다.
소배압은 강감찬의 고려군에게 피해를 입으면서 개경까지 왔지만 점령이 쉽지 않자 퇴각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때 강감찬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거의 몰살시키는 귀주대첩을 이끌어낸다. 거란의 역사서에 따르면 소배압이 다타이하(강)를 건너 퇴각을 서두를때쯤 고려군이 양쪽에서 거란을 포위하고 화살을 쏘았고 이에 거란군은 몰살하고 소배압은 무기마저 버리고 퇴각했다고 쓰여있다.
도망친 소배압에게 거란의 성종은 분노하여 모든 관직을 빼았고 내쫓았지만 외척관계인지라 차마 죽이지는 못한다. 그리고 소배압은 세월이 흘러 1023년에 다시 빈왕에 임명되지만 그 해에 바로 죽게 된다.
소배압은 고려의 침략속에서 철저하게 패배 당하면서 우리 역사에는 부족한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은 거란의 대표 외척이자 정치가 명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소배압을 이긴 우리 고려군의 그 용맹함과 위대함은 더욱 훌륭한 전과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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