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반 역사를 바꾼 경종의 독살사건조선 후반 역사를 바꾼 경종의 독살사건

Posted at 2016. 3. 10. 22:07 | Posted in 국사/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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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반 역사를 바꾼 경종의 독살사건


조선의 최고 악녀라 불리며 아직도 많은 드라마의 단골 주제로 만들어지고 있는 장희빈. 사실 모든 드라마가 장희빈이 어린세자를 남기면서 사약을 받아 죽으며 끝나게 되지만 그렇게 남겨진 어린세자 이후 왕위에 오르는 경종은 잘 모르고 넘어간다. 그 뒤를 이은 왕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빅이슈이기 때문이다. 경종 그는 과연 누구였으며 그의 독살사건은 또 무엇일까?


<드라마 동이의 경종>


|경종, 그리고 어머니 장희빈


경종의 출생을 알아보기전 그의 아버지 숙종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1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15년동안이나 후손을 못한 왕이었다. 특히 어렸을 때는 몸조차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숙종이 젊을 때 죽으리라는 말들도 많았다.


여튼 후사를 계속 보지 못하자 숙조은 초조했다. 사실 숙종은 10살 때인 1670년 세자의 신분으로 김만기의 딸을 맞았지만 딸만 셋을 낳았을 뿐 아들을 낳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딸들마저 어릴 때죽었고 인경왕후 김씨마저 1680년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숙종은 다음 해 곧바로 서인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맞았지만 민씨는 7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가 바로 비운의 왕비 인현왕후 민씨다. 그리고 이때 후사가 없는 숙종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으니 그녀가 바로 장옥정, 장희빈이다.



<드라마 장희빈의 경종>


|경종 태어나자마자 남인이 되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마침내 숙종의 아이까지 잉태하게 된다. 7년동안 아이를 못낳던 인현왕후 민씨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여인의 질투와 견제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인현왕후가 속한 정당은 숙종대에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이었고 희빈 장씨가 속한세력은 다시 권력 장악을 위해 야망을 불태우던 남인 세력이였다. 따라서 두 여인의 운명은 당시 정치세력의 목숨을 건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희빈의 아이는 서인들에게는 분명 큰 위협이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숙종 역시 당시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서인 세력들을 견제해야 할 명분이 필요했고 왕권 강화를 위해 서인세력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희빈은 아이를 잉태하니 그가 바로 후에 경종이 되는 아이였다. 숙종은 경종이 무사히 태어나자마자 얼마나 기뻤는지 장희빈 소생의 아이를 원자로 삼아버린다. 이에 서인은 필사적으로 원자 책봉을 반대했으나 숙종은 반대하는 서인을 중죄로 다스리고 종묘사직에 고하니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절차를 밟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숙종에게 반기를 든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인의 거두이자 충청도 회덕에 은거해 있던 우암 송시열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조정에서 떠나 있었으나 영의정 김수홍이 그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우암 송시열은 중국 송나라의 예를 들어 정비인 인현왕후가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서 강력하게 숙종의 행보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 상소는 숙종을 분노케 했고 정권을 남인에게 물려주게끔 만드니 서인 집권 세력은 모두 파직 당했으며 송시열은 사사당했고 남인은 집권 했다. 기사환국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정권을 잡은 남인은 피의 복수를 멈추지 않고 100여명의 서인을 사형, 유배, 삭탈관직 시키고 인현왕후 마저 궁궐 밖으로 쫒아내니 남은 서인세력에게 남인과 장희빈 그리고 경종은 적에 불과 했다.



<우암 송시열>



|경종 위기에 처하다. 


영원할것만 같았던 장희빈과 경종 그리고 남인의 집권은 채 5년을 가지 못한다. 바로 숙종의 또 다른 총애를 받았떤 숙원최씨(드라마에서는 동이)가 연잉군(영조)를 낳아 이를 등에 업은 서인이 남인을 다시 무너뜨리는 갑술환국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역시 이 배후에는 권력이 강해지는 남인을 견제하기 위한 숙종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여튼 순식간에 남인 중신들이 모두 삭탈관직을 당하고 서인들이 의정부와 군사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남인들은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숙원최씨와 연잉군 그리고 서인이 힘을 모으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서인 세력으로 하여금 나중을 보게 하는 왕자를 얻음과 동시에 연잉군으로써도 정치적으로 자신을 보호해줄 세력을 찾은 그야말로 최고의 만남이었다. 


여튼 정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여 남인 인사만 무려 130여명을 사형, 유배, 삭탈관직 시켰다. 복수가 복수를 불러오는 죽음의 당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서인의 이러한 공격은 인현왕후를 몰아내었던 남인에 대한 명백한 정치적 학살이었다. 


남인이 무너지자 숙종과 서인세력은 폐비를 당했던 인현왕후 민씨를 다시 궁으로 복위시키고 그 화살을 왕비 장씨에게 돌려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여기에 서인은 왕비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공격하고 나서며 유배를 보내고 사형을 시켜야 한다고 읍소 하였는데 이때 서인의 입장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된다.


영의정 남구만과 일부 서인은 장희재가 세자의 외숙이므로 죽이면 안된다는 온건론을 대다수의 서인은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는데 이는 서인중에서도 노론과 소론의 분열을 가속화하는 원인이되기도 한다. 특히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론은 어쨌든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긴 해야 한다고 봤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연잉군을 지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희빈 묘>


|장희빈 죽다


남인의 몰락으로 정치적 기반을 잃은 장희빈이 쓸쓸하게 별당에서 지내던 무렵 갑자기 인현왕후 민씨가 34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장희빈은 다시 자신이 왕비자리에 오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강경파인 노론은 이를 두고보지 않았다. 


노론은 장희재의 구명을 주장한 소론을 공격하며 인현왕후가 별세한 것은 희빈 장씨가 취선당 서쪽에 사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했기 때문이라며 장희빈을 함께 공격했고 이에 숙종은 격분하여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사실 장희빈이 죽을때만 하더라도 숙종은 세자자리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인현왕후의 빈자리를 소론 김주신의 딸로 채운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노론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결코 경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거기다 숙종 역시 어린 연잉군을 아끼기 시작하면서 세자가 조금만 잘못해도 그를 크게 꾸짖었다.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노론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후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세자 축출 프로그램을 세웠다.  세자는 숙종 43년 8월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는데 본래 왕이 대리청정을 하겠다하면 반대하는 것이 예의임이도 노론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만 봐도 얼마나 꼬투리를 잡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바로 이때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대리청정을 맡은 세자를 노론은 더 이상 건드릴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숙종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바로 그가 경종이다. 


<연잉군>


|경종 독살설의 전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잡은 소론은 노론을 향한 정치적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 노론을 몰아낸 신축환국을 이끌어낸 소론은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한다는 목호룡의 고변인 임인옥사를 통해 완전히 기세를 잡는다.  이때 죽은 노론만 100여명에 유배된 이가 114명이었으니 노론의 피해는 말로 못할 정도로 심했다. 


이제 세자 연잉군의 앞날은 바람앞에 등불 같았고 실제로도 수많은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원래 몸이 약했던 경종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다. 


경종은 8월 6일 창경궁으로 옮겨 몸조리를 했는데 다음 날 설사기운에다 한열까지 겹쳐 약방에서 시호백호탕을 지어 올리고 약방 제조가 숙직을 하였다. 그런데 이후 경종이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였는데 이때 8월 20일 대비전에서 게장과 생감을 보낸다. 


어의 이공윤은 게장과 생감을 올리지 말로고 권유했으나 세제 연잉군은 어의들의 반발을 누르고 이를 그대로 올린다. 경종은 세제가 올린 게장을 먹고 수라를 평소보다 많이 먹었고 그러자 세제는 어의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감을 권했다. 


바로 그날밤부터 경종은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오기 시작했는데 기록을 보면 어의들은 낮의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약을 처방했으나 복통과 설사가 더욱심해져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러한 혼돈속에 연잉군은 또다시 어의들과 처방을 두고 대립했는데 연잉군은 어의에게 인삼과 부자를 쓰라 명했으나 어의 이공윤은 강하게 반발 했다. 


결국 세제는 인삼과 부자를 올렸고 경종의 눈동자가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다. 이에 연잉군은 인삼이 양기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으나 이는 경종의 마지막 죽음 직전의 모습이었다. 


경종은 4년 8개월, 만 46살의 나이로 죽으니 분명 연잉군의 행동은 독살의 의지가 없다 하더라도 분명 해서는 안될 행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는 조선왕조의 독살설 중 가장 유력한 독살설의 하나가 된다 할 수 있다.


<경종 무덤>


경종의 이러한 의혹 짙은 죽음은 뒤이어 왕위에 오른 연잉군 내내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고 졸지에 왕을 잃으며 모든 권력을 잃게 된 소론강경파들은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경종 독살의 의혹을 전면에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난, 나주벽서사건 등 굵직한 역모사건들은 영조의 발목을 잡으며 이는 사도세자의 비극과도 연결 되니 그 업보는 다 받았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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